2021.3.4.사순 제2주간 목요일 예레17,5-10 루카16,19-31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와 믿음뿐이다-
늘 강조하지만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 대한 근본적 치유제는 회개와 믿음뿐입니다. 참으로 무지의 병이 치유되어 하느님을 닮아갈 때 진짜 사람,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저절로 사람이 아니라 사람이 된다는 것은 ‘선물이자 평생과제’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은 부단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 무지에서 벗어나 자비롭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인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입니다. 복음의 후반부가 입증합니다. 사후 저승에서 고통을 받는 부자가 천상의 아브라함에게 하소연합니다.
-“안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회개하라 주시는 회개의 표징이 되는 예화입니다. 비상한 회개의 표징이 아니라 눈만 열리면 곳곳에 차고 넘치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성서도 온통 회개의 표징이 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이런 일상의 회개의 표징들을 읽고 회개하여 믿지 못하면 그 무슨 비상한 표징도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지한 부자에게 그의 집 대문 앞의 가난한 라자로는 아주 강력한 회개의 표징이자 구원의 표징이었는데 완전히 무지에 눈먼 부자는 이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무지의 부자는 별종의 인간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일 수 있습니다. 소비주의, 쾌락주의, 개인주의에 중독되어 무지의 삶을 살다보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복음의 무지한 부자입니다.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복음의 무지한 부자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타인을 부요하게 하는 자가 참으로 부자다”-
사람은 섬이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나와 더불어 이웃을 행복하게 삶, 나와 더불어 이웃을 부요하게 하는 삶이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무지한 부자는 이런 진리를 몰랐고 바로 우리의 현실일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부자는 주변과 완전히 단절되어 깊은 골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 무지의 감옥에 스스로 갇힌 ‘수인囚人’입니다. 하느님과의 단절, 이웃과의 단절, 참 자기와의 단절, 바로 이것이 지옥입니다. 부자는 찬미도 감사도 회개도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그 무슨 소통의 수행이 없었던 완전 불통의 무지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겉은 화려하나 내면은 지옥입니다. 부자는 이름이 없는데 가난한 이는 ‘하느님이 도와 주신다’라는 뜻이 ‘라자로’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참으로 존재감 없는 무명無名과 무지無知의 부자와는 대조적으로 존재감 충만한 라자로라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것이 부자에게 라자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nobody)이었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정말 라자로가 자기와 똑같은 사람임을 까맣게 몰랐(잊었)던 것같습니다. 부자가 라자로를 학대한 것도 내쫓는 것도 아닙니다. 싦어하거나 무시하거나 미워한 것도 아닙니다. 문밖의 그냥 돌덩이나 나무의 사물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감 없는 완전 무관심의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죽든 말든, 굶주리든 말든 전혀 상관없는 존재, 한 마디로 부자는 따뜻한 피를 지닌 사람이 아닌 무지에 완전히 눈먼, 인간미를 인간성을 상실한 냉혈冷血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겉은 사람이지만 말 그대로 ‘괴물怪物’입니다. 아마 이런 부자들 없지 않아 많을 것입니다. 바로 무지한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를 두고 하는 다음 루카복음 말씀같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위로를 받았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예레미야의 두 경우도 복음의 부자와 가난한 라자로의 내면의 실상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없는 소금땅에서 살리라.”-
겉이 아무리 화려한 부자라도 이런 내면이라면 완전 지옥입니다. 천국같은 환경에서도 이처럼 지옥의 내면을 살 수 있는 것이요, 바로 복음의 무지한 부자가 그러합니다. 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다음 장면입니다. 지옥같은 환경 중에도 내면은 천국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이게 진짜 삶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난 자비롭고 지혜로운 이들에게 주어지는 축복을 상징합니다. 오늘 복음은 사후 완전히 운명이 바뀌어 부자는 저승에서 고초를 겪고 라자로은 천상에서 위로를 받습니다.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건네는 말이 의미심장합니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 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이처럼 죽어서도 계속되는 살아 생전의 깊고 깊은 단절의 골임을 깨닫습니다. 겉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부자와 라자로의 단절의 골은 깊고 깊었던 것입니다. 과연 우리 주변에 가난한 라자로는 없는지, 서로간의 단절의 골은 깊지는 않은지 자문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후반부 말씀도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끊임없는 회개만이 무지에 대한 유일한 치유제입니다. 주님 안 제자리에서 이웃과 더불어 제정신으로 제몫을 하며 제대로 구원의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무지의 병을 치유해주시며 서로 간의 단절의 골을 메꿔 주십니다. 끝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3월의 기도지향인 ‘화해성사’에 관한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내가 고백성사 보러 갈 때, 그것은 치유받기 위함이자 내 영혼을 치유하기 위함이며, 더 큰 영적 건강을 얻기 위함이요, 비참에서 자비로 넘어가기 위함입니다. 고백성사의 중심에는 내가 고백한 죄가 아닌 우리가 받은, 우리가 언제나 필요로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고백성사의 중심에는 우리를 기다리시는, 우리를 듣고 용서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마음 안에서, 우리의 잘못을 앞에 내려 놓으십시오. 그리고 새로워진 깊이로 하느님의 용서와 무한한 자비를 맛볼수 있는 화해성사를 체험하도록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분의 교회에 ‘고문자(torturers)’들이 아닌 자비로운 사제들을 주십사 기도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