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평생과제 -회개와 자비행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일-2021.3.6.사순 제2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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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6.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우리의 평생과제

-회개와 자비행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닮는 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

 

새벽 성무일도시 계속된 시편136장1-26절 후렴입니다. 오늘 복음과 그대로 일치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신명기 32장11절 다음 구절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잘 드러냅니다.

 

“독수리가 제 새끼를 보호하듯이, 당신은 두 날개를 펴시어 그를 품어주시고, 주님의 날개로 그를 인도하시었도다."

 

입으로 짓는 악업을 불가에서는 구업口業이라 합니다. 참으로 입의 말로 짓는 죄는 얼마나 크고도 많은지요. 칫솔로 입을 닦을 때마다 ‘마음의 입’도 닦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어제는 수녀원에서 오전 내내 수녀님들에게 고백성사를 드렸고 오후 귀원해서는 수도형제들과 함께 매월 첫주 금요일에 있는 고백성사를 봤습니다.

 

새삼 회개하고 새롭게 살기를 다짐하는 평생성사인 고백성사와 성체성사인 미사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데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성사인지 깨닫습니다. 수녀원에서 고백성사때 마다 가장 연노한 노수녀님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신부님, 강복만 주십시오.”

“고백성사는 안보고요?”

“저는 이 수녀원에서 90세로 가장 나이가 많습니다 지금도 매일 성경필사를 합니다. 죄지은 것이 생각안나요. 그냥 강복만 주세요.”

“좋습니다. 감사하며 기쁘게 사세요.”

 

아마 자비하신 아버지도 그렇게 대답하시리라 봅니다. 하여 고백성사때 마다 늘 강복만 받는 노수녀님입니다. 어제는 고백성사를 받은 후 두리번 거리며 주위를 찾아 봤습니다.

 

“신부님, 모자는 거기 있는데요?”

“아뇨, 모자가 아니라 신부님께 드릴 만한 것이 없나 해서 찾아 봤어요.”

“신부님, 얼굴만 보는 것도 선물입니다.”

 

고백신부님의 청담淸談 또한 자비하신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어제 교황님의 3월 기도지향중 마지막 대목도 생각납니다. 고백성사를 지칭하는 대목같습니다.

 

“하느님께 그의 교회에 자비하신 사제들을 보내주십사 기도합시다. ‘고문자(torturers)’들이 아닌 자비하신 사제들을!”

 

우리의 평생과제는 끊임없는 회개와 자비행을 통해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께 우리를 대변하여 기도합니다.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당신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당신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십니다. 당신께서 저희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바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을 닮은 아버지를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만납니다. ‘하느님의 깨끗하게 하는 진노(God,s cleansing wrath)’란 교황님의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우리의 평생과제와 하느님의 평생소원이 일치를 이루는데 바로 하느님의 평생소원은 다음 성구에서 잘 드러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바로 오늘 주님은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를 통해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읽을 때 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와닿은, 늘 샘솟는 영감을 주는 ‘순복음(pure Gospel)’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이보다 잘 드러내는 복음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예수님이 없었다면 어디서 이런 복음을 만날 수 있을런지요!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특징을, 자비하신 아버지의 리더십을 묵상해 봤습니다.

 

1.자비하신 하느님은 자녀들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고 끝까지 믿어주는 분이십니다. 걱정과 우려가 많았겠지만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작은 아들이 원하는 대로 가산을 분배해 주십니다.

 

2.자비하신 하느님은 동구밖 문밖에 서서 당신 자녀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는 날마다 눈물의 기도로 작은 아들의 귀환을 기다렸을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잊어도 부모는 자식을 잊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늙어가면서 부모를 생각하기 시작한다 합니다. 이런 사랑의 기도가 통했던 듯 합니다. 빈털터리 거지가 되자 제정신이 든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회상하며 회개합니다. 아들의 회개를 촉발시킨 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추억이었음을 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3.자비하신 하느님은 회개한 자녀의 과거는 불문에 붙이십니다. 결코 과거를 추궁하여 캐고 따지는 일이 없으며 오직 현재 회개한 자녀를 기뻐할 뿐입니다. 다음 돌아온 작은 아들의 귀환의 축하잔치가 하느님의 기쁨을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런지요! 작은 아들이 상징하는 바 복음의 세리와 죄인들이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작은 아들같은 우리의 회개를 축하하여 날마다 미사잔치를 베풀어 주십니다. 추락한 품위에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자녀로서 고귀한 품위를 회복한 작은 아들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미사은총이 우리를 끊임없는 회개로 하느님 자녀다운 품위의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의 대조가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큰 아들이 상징하는 바 복음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은 물론 우리일 수도 있습니다. 외관상 아버지의 ‘자녀다운 삶’인줄 알았는데 ‘종같은 삶’이었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아버지의 자비를 거의 몰랐던 큰 아들입니다. 몸은 가까이 있었지만 마음은 멀리 있었던 듯, 생각없이 영혼없이 살아던 듯 싶습니다. 바로 다음 큰 아들의 격분激憤한 반응에서 그의 내면이 그대로 폭로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이런 큰 아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격렬한 항의와 분노인지 자기 동생이라 하지 않고 당신의 저 아들이라 합니다. 정말 작은 아들은 물론 큰 아들 역시 회개의 대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회개가 어려운 이들은 이런 자칭 의롭다 생각하는 종교인들입니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도 있듯이 자기도 모르는 중에 죄를 짓고 세속화되어 살아가는 종교인들의 회개가 정말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자비하신 하느님은 결코 조건반사적 감정적 화를 내지 않습니다. 화내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 무조건 집니다. 화는 자기를 파괴하는 폭풍과 같다는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듯이 당신 자녀 이기는 하느님은 없습니다. 또 하느님은 절대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하느님의 마음이 그러합니다. 작은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편애가 아니라 그 아들에 대한 적절한 처방의 사랑일뿐입니다. 다음 큰 아들에 대한 하소연같기도한 아버지의 깊고 큰 사랑과 조용한 설득이 잔잔한 감동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오늘 복음에서 큰 아들의 응답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회개로 응답하여 동생의 귀환축하잔치에 참여했을지, 그것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며 독자들인 우리는 과연 누구인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 그대로 우리의 내면을 비춰주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 

 

과연 나는 작은 아들입니까 큰 아들입니까? 혹은 작은 아들이면서 큰 아들입니까? 혹은 자비하신 아버지를 가장 닮은 예수님 같은 아들입니까? 새삼 우리의 영원한 롤모델은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가장 닮아 일치를 이룬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새삼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비의 여정은 예닮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날로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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