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순례자 -경청과 겸손, 인내의 사람-2021.3.8.사순 제3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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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8.사순 제3주간 월요일                                                          2열왕5,1-15ㄷ 루카4,24ㄴ-30

 

 

 

믿음의 순례자

-경청과 겸손, 인내의 사람-

 

 

 

복음에 앞선 화답송 후렴이 강렬한 느낌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이까?”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이에 내재해 있는 하느님 향한 갈망을 표현하는 시편입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하느님을 만날 때 영육의 목마름과 굶주림의 해소요 근원적 치유입니다.

 

평화의 순례자,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라크 방문이 연일 감동의 물결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순교자들은 똑같은 하늘에서 별들처럼 함께 빛나고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한 성인들은 어디서나 영원히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황님은 변화는 우리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교황님의 가르침에 감격한 바그다드 교수의 감사의 고백입니다.

 

“이라크 교회는 살아있다(alive)”

미사시 교황님의 강론중 말마디입니다. 새삼 옛 사막교부들의 유일한 삶의 목표는 ‘참으로 사는 것(to be truly alive)’이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살아있다 하나 유령처럼 살아가는 죽어있는 삶은 얼마나 많은지요. ‘사랑이 빠지면 헛것이요 유령이다. 헛것이, 유령이 되어 살지 말자!’ 어제의 순간적 다짐이 새롭습니다. 

 

오늘은 반대로 제1독서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믿음의 순례자’가 되어 나병을 치유받고자 이스라엘 땅을 향해 방문 여정에 오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주는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진진하며 많은 깨우침을 줍니다. 차별없이 세상 곳곳에 미치는 하느님 섭리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 나아만이요 이를 상대하는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의 의연한 처신도 신선한 충격의 감동입니다.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평범한 묘사같지만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나아만 역시 하느님 사랑의 섭리의 손길하에 있는 익명의 믿음의 순례자임을 깨닫습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전화위복, 천형이라라는 나병이 하느님 섭리의 맥락중에 바야흐로 천복이 될 순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일거에 날려 버립니다. 나병이 없었다면 나아만은 결코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섭리의 손길중 하나가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보잘 것 없는 어린소녀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편견을 깹니다. 나아만의 아내는 소녀의 말을 전했고 경청의 사람, 나아만은 겸손히, 많은 선물을 가지고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찾아 나섭니다. 나아만의 방문에 놀라 전정긍긍하는 이스라엘 임금을 진정시키는 엘리사의 의연하고 침착한 모습이 참 인상적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라는 작아도 이런 보물같은 하느님의 사람, 예언자를 지닌 나라가 참으로 부자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나아만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을 수련할 기회를 줍니다. 집문 앞에 대기 중인 나아만에게 심부름꾼을 시켜 해야 할 일을 전합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시시해 보이는 선입견과 편견을 깨는 요구요, 아직 겸손과 순종의 수련이 덜된 교만한 나아만은 경솔한 조건반사적 반응을 보입니다. 너무 합리적이고 타당한 자신의 생각이요 엘리사의 처사에 분노해 발길을 돌리는 순간, 부하들의 지혜로운 조언을 경청하여 순종하는 나아만입니다. 역시 부하들의 지혜로운 조언, 역시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깹니다. 참으로 겸손히 주위에 활짝 열려 깨어 경청하며 모두로부터 배워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선입견과 편견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아만은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으로 응답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준대로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니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지니 완전 치유됩니다. 천형이 천복이 되는 놀라운 기적적 치유입니다. 결국 나아만의 나병을 치유한 것은 엘리사도 아니요, 요르단강물도 아닌 순전히 나아만의 겸손한 믿음에 하느님의 은총이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에 하느님의 은총만 있으면 일상의 모두가, 오늘 지금 여기가 치유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굳이 성지를, 영험있는 분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최고의 의사이신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하느님의 이름을 정성껏 부르며 웬만한 병은 다 치유받았다 합니다. 나아만의 믿음의 고백이, 해피엔드로 끝나는 나아만의 치유 일화가 참 깊고 아름답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육신의 나병만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으로 영혼의 병까지, 전인적 치유를 받은 나아만입니다. 말 그대로 나아만의 믿음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참으로 근원적 치유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고백에서 이뤄짐을 봅니다. 이런 나아만의 일화가 오늘 복음의 이해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눈먼 나자렛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봤습니다. 예수님은 엘리야와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 그리고 엘리사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실화를 예로 들면서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 눈먼 이들의 각성을 촉구하십니다. 편견과 선입견에 눈이 멀어 엘리야와 엘리사를 능가하는 참 예언자 예수님을 몰라 본 고향사람들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의 나자렛 고향 사람들을 전혀 탓할 수 없습니다. 바로 편견과 선입견은 우리 인간의 보편적 무지의 병이기 때문이요, 이에 대한 결정적 처방은 참된 회개의 은총뿐입니다.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 눈먼 고향 사람들이 회개하기는 커녕 악행이 점입가경입니다. 화가 잔뜩 난 이들은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정면돌파하여 미련없이, 표표히 떠나십니다. 이 아름다운 장면 또한 우리 독자들에게는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서 눈뜨라는 강렬한 회개의 표징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의 편견과 선입견의 영적 나병을 말끔히 치유해 주시어, 전인적 건강의 삶과 더불어 경청과 겸손, 인내의 ‘믿음의 순례자’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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