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알라 -회개, 겸손, 지혜-2021.3.13.사순 제3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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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13.사순 제3주간 토요일                                                              호세6,1-6 루카18,9-14

 

 

 

너 자신을 알라

-회개, 겸손, 지혜-

 

 

 

가톨릭 교회 인사중 교회 밖에 널리 알려져 있는 명망있는 분은 아마 강우일 베드로 주교일 것입니다. 주교의 잊혀지지 않는 지혜로운 말마디가 있습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느냐? 방법을 물었을 때 “절대 반응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친다.” 하신 답변입니다. 

 

어제는 한겨레 신문에 ‘그리움이라는 능력’이란 주교의 긴 칼럼이 있었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고정 필자로서 주기적으로 글이 오릅니다.

 

“요즘 내 안에서 도대체 ‘그리움’이란 뭘까 하는 물음이 자꾸 떠오른다. ‘그립다’라는 말의 뿌리에는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에게 그리움이란 능력이 있음은 대단한 긍정적인 에너지다. 그리워함은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 나아가는 영혼의 에너지다. 시련과 도전에 시달려 좌절하고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은 에너지가 작동하면 포기하지 않고 원기를 회복할 기력이 생긴다. 임종을 맞아 체력이 다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병자도 그리운 혈육이 돌아와 이름을 부르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마지막 사랑의 시선을 보낸다.”

 

참 곱고 깊고 아름다운 순 우리말 ‘그리움’이요, 믿는 이들의 궁극의 그리움의 대상은 하느님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임종어입니다. “하느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의 임종어였고, “보라, 신랑이 오신다!” 환호와 더불어 임종한 성녀 젤투르다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근원적 실존적 ‘외로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주님께 대한 그리움뿐입니다. 사실 저는 외로움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외로움은 즉시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전환되기 때문입니다. ‘수도자란 누구인가? 라는 제 글의 일부를 인용합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어 수도자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그리움이 사라지면 수도생활은 몰론 영성생활은 끝이다. 하여 수도자를 갈망의 사람, 그리움의 사람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그리움이 있을 때 저절로 깨어있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아무리 세월 흘러 나이들어도 주님께 대한 그리움은 날로 깊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영혼의 젊음의 비결도 주님께 대한 날로 깊어지는 그리움에 있습니다. 바로 사순시기는 주님께 대한 그리움을 회복하는 시기입니다. 이런 주님을 찾는 그리움은 회개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우리만 주님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도 우리를 그리워하십니다. 사랑의 시인이자 신비가이고 예언자인 호세아는 그리운 주님께 돌아갈 것을 호소하십니다. 바로 그리운 주님께 돌아가 주님을 만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자, 주님께 돌아가자. 그분께서 우리를 잡아 찢으셨지만 아픈데를 고쳐 주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 주시리라.---그러니 주님을 알자. 주님을 알도록 힘쓰자. 그분의 오심은 새벽처럼 어김없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비처럼,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시리라.”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봄비처럼 오시어 그리움에 목마른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시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봄비’하면 떠오르는 제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봄비

하늘 은총

내 딸 아이 하나 있다면

이름은 무조건 봄비로 하겠다”-2005.3

 

영원한 그리움의 대상인 주님을 만날 때 해갈되는 그리움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인 절망이나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무지의 마음병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주님뿐입니다. 하여 매일미사가 그렇게 고맙고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하느님 주신 참 고마운 선물이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께 대한 그리움으로, 가난한 빈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아름다운 영혼이 바로 복음의 세리입니다. 봄비를 목말라하는 메마른 대지처럼 주님을 향해 활짝 마음을 열어 기도하는 가난한 영혼의 세리입니다.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우리가 궁극에 바칠 마지막 기도는 이 자비송 하나뿐입니다. 미사 시작전 세 번 연속되는 자비송도, 동방수도승들이 바치는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도 이 말씀에 근거합니다. 바로 이런 주님의 자비를 청하는 빈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음 주님의 말씀이 참 통쾌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봄비와 같은 주님 은총으로 촉촉이 젖은 의로운 영혼이 되어 귀가한 겸손한 세리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회개와 겸손, 지혜의 사람이 세리입니다. 정말 회개를 통해 자기를 아는 자가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참으로 자기를 알면 알수록 주님의 은총에 감격하게 되고 날로 너그럽고 자비로워져 결코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합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사순시기 그리도 많이 강조되는 회개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회개도 없고, 회개 없이는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도 불가능합니다.

 

세리와 대조되는 바리사이의 기도가 참 꼴불견입니다. 자기를 전혀 모르는 무지한 기도입니다. 똑같이 “오, 하느님!”으로 시작합니다만 세리와는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 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결정적으로 회개와 겸손이 없습니다. 참으로 회개가 힘든 것이 이런 바이사이처럼 외적으로 죄가 없어 보이는 모범적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건 주님과 소통의 대화의 기도가 아니라 일방적 자기자랑, 자화자찬의 독백입니다. 말그대로 하나마나 기도요 오히려 안했으면 좋을 기도입니다. 기도한다면서 남 판단하는 죄를 짓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에 대한 호세아를 통한 주님의 탄식 말씀입니다.

 

“에프라임아, 유다야, 내가 너희를 어찌하면 좋겠느냐? 너희의 신의는 아침 구름 같고, 이내 사라지고 마는 이슬같다.”

 

너무나 피상적인, 깊이가 전혀 없는, 알맹이가 없고 온통 껍데기만 번지지르한 무지한 바리사이들을 향한 말씀같습니다. 참으로 끊임없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날로 겸손하고 지혜로워지고 깊어지는 영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심중을 그대로 대변한 호세아를 통한 주님의 마지막 말씀 역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참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 당신을 알고 나를 아는 신의와 예지, 겸손과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시간 회개한 우리 모두의 고질적 마음의 병인 무지와 허무, 절망을 치유해 주시고 신의와 예지, 겸손과 지혜를 선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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