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2021.3.21.사순 제5주일 ​​​​​​​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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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21.사순 제5주일                                                 예레31,31-34 히브5,7-9 요한12,20-33

 

 

 

삶과 죽음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작년 9월29일 대천사 축일, 프란치스코 영명축일(10.4)을 앞둔 고속 도로에서의 대형 교통 사고중 구사일생의 기적으로 살려 주신 하느님은 올해 사순절 첫날 재의 수요일 아침 미사후 산책중에 참 신비로운 기적 같은 현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에 위치한 예수성심상 아래 바위가 멀리 측면에서 바라 봤을 때 흡사 기도하는 사람처럼 보여 가까이 가보니 사람이 아닌 바위였습니다. 

 

참 감동스런 신기한 충격적 체험이었고 즉시 사진에 담아 많은 지인들과 나눴으며 그 이후 매일 산책 때 마다 저절로 눈길이 갔고 또 사진에 담았습니다. 볼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어제는 마침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한참 동안 기도하던 자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숱한 이들의 애환을 듣다 보니 기도하는 바위의 형상으로 변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온몸과 온맘으로 한결같이 사랑한 예수님을 닮아 아름다운 삶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 분들을 대하면 늘 감동합니다.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답을 줍니다. 이런 사랑의 아름다움이 늘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바로 어제 그런 분에 대한 일화를 읽고 길지만 인용하여 감동을 나눕니다.

 

-나를 키워주신 외할머니는 150센티미터가 간신히 넘는 키에 아주 작은 체구를 기지셨다. 살 붙은 데도 거의 없으셔서 주름이 많은 얼굴이며 손이 안쓰럽기까지 한 분이셨다.

 

참 독실하신 분이셨다. 해야 할 기도를 거르는 법이 없고 무슨 일이든 하느님이 곁에서 귀뜸이라도 해주시는 듯이 말씀을 하시곤 했다. 장난이 심하면 “하느님이 이 노옴! 하신다” 정도는 하루에 수십번 듣던 이야기이고, 내가 억울하거나 분노하거나 속이 상해 울면 그냥 조용 조용히 “참아라. 모두 죄로 갈 거다. 네가 잘못한 거 없다”라고 하셨다. 격하게 내 편을 들어주시지도 않았고, 나 대신 누군가에게 화를 내주시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참으라고만 하셨지만 그 속에 옳고 그름은 분명히 지적해주신 셈이다.

 

할머니 생전에 거짓을 말하셨던 기억이 없고, 남에게 심한 소리를 하거나 분노를 격하게 표출하는 모습도 뵌 적이 없다. 그냥 웬만하면 참고 지나가는 분이셨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 동안 손에 기도서나 묵주가 들려 있었고, 새벽에 얼핏 잠이 깨면 기도를 하시던 할머니가 그 깡마른 손으로 내 얼굴이며 가슴께를 쓰다듬어 주셨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손길은 아니었지만, 할머니가 동시에 입속으로 외우는 기도 소리와 함께 익숙한 보호막에 싸이듯 안도 속에 다시 잠들곤 했다.

 

여름이니 몸에 이불이 닿는 것조차 더위를 보태는 것 같아도 꼭 배는 가려야 자는 버릇은 할머니 때문에 생겼다. 늘 그렇게 배는 꼭 덮어야 한다고 이불을 찰 때마다 도로 끌어다 얹어주곤 하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무의식중에 하는 버릇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할머니 손이며 입으로 내게 전달된 것들이다.

 

세월 가며 그 감사함을 잊지 못하지만 한편으로 할머니 생각은 늘 슬프다. 신앙 때문인지 성격 때문인지 늘 참으라고만 하셨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실제로 무슨 일을 당해도 참고 혼자 삭이는 할머니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나는 늘 대신 분노하며 슬펐다. 그런데 그러면서 체념하듯 해주신 죄와 잘못에 관한 말씀들이 내게는 아주 오랜시간이 지난후에 큰 힘이 됐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종로4가 성당의 주일미사를 할머니가 빠지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나를 끔찍이 챙겨주시고 아껴주셨던 할머니가 주일미사만큼은 아무리 내가 칭얼대고 할머니 손길을 졸라도 양보하시는 법이 없으셨다. 그러면서 조르는 나 때문에 발길이 안 떨어지시는 날엔 꼭 한마디 하신다. “이 할미가 하느님 뵈러 갔다 오는 게 내 새끼한테도 좋지.”

 

할머니가 매달리는 내 손을 떼어 놓고 성당에 가신 날은 동대문 시장에 들러 중국 사람이 쪄내는 만두를 손에 들고 오시곤 했다. 포장을 열면 나무 냄새와 만두 냄새가 모락모락 솟고, 나는 정신없이 만두를 입에 물었다. 그러다 두 개째를 입에 물으면서 “할머니도 하나 먹어!”하고 내밀면 할머니는 “그래”하시며 아무 말 없이 만두를 받으셨다. 게 눈 감추듯 다섯 개를 다 먹어치우고 나면, 먹는 시늉을 하느라 이빨 자국만 살짝있는 만두를 뒷짐 진 손에서 내미시며 “할머니는 먹기 싫다. 내 새끼 더 먹어라” 하셨다.

 

당신 손으로 기르는 어린 손자의 미래를 위한 기도도 늘 모자라지 않나 생각하셨을 것이다. 그렇게도 자신의 것은 무엇 하나 챙기는 법이 없으셨던 분이 어느 날 갑자기 내게 평생 처음으로 부탁을 하셨다.

 

“용만아, 내가 성당에 다니는데 이제 외투가 무거워, 가볍고 따뜻한 게 있으면 좋겠어.”

 

생전 당신 자신에게는 아무런 욕심도 없고 심지어 당신에게 필요한 것조차도 꼭이라는 수식어 붙을 때까지는 내색조차 않으셨던 할머니의 부탁을 듣고, 한편으로는 너무도 처음 겪는 일이라 놀랐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급함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할머니 외투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마침 한두 주 후에 일본에 출장 갈 일이 있었다. 노인이 많은 사회라 노인들 물건이 많은 곳에 가서 정말 좋은 외투를 사 드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지킬 수조차 없이 허망하게 며칠 후 세상을 떠나셨다. 내게 평생 주기만 하신 할머니의 외투를 장례 후 기어이 사들고 왔으나 미련이 남은 나의 부질없는 짓일 뿐이었다, 이렇듯 할머니는 내게 회한과 그리움이며 안식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이번 주일엔 성당에 가야겠다!”

 

할머니 가시고 한참 후 어느 새벽에 문득 나도 모르게 그 한마디가 튀어 나왔다. 그렇게 정말 오랜만에 성당을 찾은 그 날, 주일미사 시간이 어찌 지났는지도 모들 정도로 갑작스러운 환희와 즐거움 속에 빠졌다. 늘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한 시간 미사 동안 수십 번 시계를 들여다 보던 내가, 그날은 무슨 이유인지 기도 하나하나가 가슴을 흔들고 부르는 성가마다 그 어느 애창곡보다 입에 붙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타당한 논리적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고는 그 뒤엔 열심히 성당을 찾게 되었다.

-(박용만 실바노;“그늘까지도 인생이니까”.52-57쪽 참조)

 

이렇게 강론에 긴 일화를 인용하기는 수도사제 생활 33년 동안 처음입니다. 새삼 ‘삶과 죽음’에 대해,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을 주는 일화입니다. 그대로 오늘 말씀의 진리와도 일치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그 모범입니다.

 

첫째.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길은 단하나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요 예수님이 그 모범입니다. 예레미야의 제1독서 말씀중 그날은 바로 오늘이요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 때에 나는 새계약을 맺겠다. 나는 그들의 가슴에 내 법을 넣어주고, 그들의 마음에 그 법을 새겨 주겠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참 좋은 삶과 죽음을 위한 결정적 조건이 됨을 깨닫습니다. 과연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과 신뢰의 우정 관계인지 깨어 살펴보게 합니다.

 

둘째, 순종의 인생 여정입니다.

예수님의 평생 순종의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는 감동의 샘입니다. 히브리서의 증언은 늘 읽어도 영감과 감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순종의 여정’이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는 ‘순종의 학교’입니다. 이런 순종의 여정을 통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날로 깊이 뿌리내리는 정주의 삶이 될 것입니다.

 

셋째, 영광스러운 죽음입니다.

참된 죽음은 삶의 완성이요 삶의 실현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그분만을 따른 모든 성인들의 삶이 이를 입증합니다. 죽기까지 주님을 사랑하여 섬김과 추종의 삶을 살았던 주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바탕한 예수님의 유언같은 말씀이 우리의 영광스러운 죽음에 좋은 자극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습니다.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아침 성무일도 즈카르야 후렴, 요한12,27-28ㄱ)

 

이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응답이 통쾌하고 고맙습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겠다.”(요한12,28ㄴ).

 

이어지는 두 번째 고백입니다.

“내가 땅위에서 높이 들리게 될 때는 모든 것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저녁 성무일도 마리아 후렴, 요한12,32).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상징하는 바, 세상에 대한 승리요 하느님께로의 영광스러운 귀환이자 새로운 삶의 시작을 뜻합니다. 이제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았고 이 세상의 우두머리는 밖으로 쫓겨났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죽음의 결과요, 우리의 영광스러운 죽음의 예표가 됩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승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격려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ㄴ).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순종의 여정중에 당신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를 날로 깊게 하시고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며 마침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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