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29.성주간 월요일 이사42,1-7 요한12,1-11
주님의 종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새벽 성무일도 시편 한 구절이 감미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주님, 당신의 종 위에 당신의 얼굴을 빛내어 주시고, 자비로우심으로 나를 구하옵소서.”(시편31,17).
그대로 세상의 종이 아닌 주님의 종인 우리에게 선사되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엊그제 ‘법의 날’에 교황청 법정에서 일하는 법관들에게 하신 교황님의 한 말씀도 신선했습니다.
“참 정의를 위해 하늘을 바라보라.”(Look to heaven for true justice)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실행해야 할 주님의 종인 우리들입니다.
‘주님의 종’이란 말이 참 친근하게 와닿습니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고백은 마리아의 다음 고백일 것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뿐 아니라 참으로 믿는 이들의 신원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의 원조는, 전형적 모범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종하면 연관되어 떠오르는 단어가 섬김입니다.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은 같은 어원이라 섬김의 종으로 정의할 수도 있겠습니다.
종과 섬김하면 떠오르는 생생한 일화가 있습니다. 수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한, 강론에도 누차 인용했던 일화입니다. 수도원 초창기 90년대 초반쯤될 것입니다. 한밤중에 피정신청 전화를 받았다가 퉁명스런 제 전화 답변에 분노한 신자분에게 사과하며 무마한 후 순간 깨달았던 진리입니다.
“아, 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는 수도자구나! 섬김의 직무, 서비스업이다. 서비스업은 3개 요건을 갖춰야 되겠구나. 첫째, 사람이 좋고 친절해야 하고, 둘째, 실력이 있어 유능해야 하고, 셋째, 내외적 환경이 좋아야 하겠구나!”
하는 자각에 우리의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러니 넓고 깊게 보면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해야 할 것입니다. 음식점, 병원의 서비스업을 보면 담박 드러나는 서비스업의 세개 요건, ‘좋은 사람, 좋은 실력, 좋은 환경’이요, 저는 이런 세개의 잣대로 우리 수도원을 점검해보곤 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종의 모범은, 종과 섬김의 영성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에서도 누차 강조되는 이런 주님의 면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중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이 요약된 고백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4-45)
이런 예수님의 ‘종과 섬김의 영성’의 모범이 결정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은 성목요일 만찬 미사때 보게 될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는 장면일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주님의 종으로서 신원의식에 오늘 제1독서의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가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주님의 종으로 살고자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 나의 영을 준 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지치지도 않고 기가 꺾이는 일이 없이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얼마나 매력적인 주님의 종인지요, 섬세하고 자비로우며 겸손하고 온유하며 존중과 배려, 공감의 인물이며 한결같이 성실한, 결코 약한 모습이 아닌 외유내강의 모습입니다. 그대로 본받고 싶은 예수님에 대한 묘사처럼 생각됩니다. 당신의 종들을 파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도 우리에게는 감동적입니다.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불어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을 몰라 무지와 교만에 눈먼 사람들이요,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참된 용기와 힘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종의 묘사도 고무적이고 감동적입니다. 예수님은 물론 주님의 종들인 우리 모두에 대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어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빛이 되게 하였으니,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빛과 해방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되는 주님의 종들인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누구보다 이런 주님의 종의 결정적 실현이자 모범은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예수님께 감격한 오늘 복음의 마리아의 처신이 우리에게 끝없는 영감과 감동을 줍니다.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고 예수님을 환대하는 베타니아의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의 모습도 참 아름답습니다.
여기서 극단적 대조를 이루는 마리아와 유다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깊이 사랑했던 주님의 종, 환대와 섬김의 사랑의 관상가 마리아요, 영적으로 눈먼 물질주의자 유다입니다. 누가 진정 주님의 종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다음 마리아에 대한 묘사는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그대로 마리아의 사랑의 향기, 영혼의 향기, 봉헌의 향기를 상징합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온몸과 온맘으로 사랑의 환대, 사랑의 섬김에 올인하는 마리아입니다. 이 또한 우리에게 기막힌 회개의 표지가 됩니다. 문득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린 예수님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 유다와는 얼마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지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마리아에 대한 변호가 참 기민하고 지혜롭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새삼 사랑은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결정적 사랑과 섬김의 순간에 예수님을 온몸과 온맘으로 환대한 주님의 종, 마리아요 이를 인정하신 주님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의 종으로 섬김의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외로움이나 그리움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주님의 현존감에서 오는 편안함, 충만함이 우리를 가득 채울 것입니다.
새삼 외로움이나 그리움에 대한 근원적이며 본질적 대책은 주님의 종으로서 섬김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종,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온몸과 온맘으로 환대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종이 되어 한결같이 섬김의 삶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