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3.30. 성주간 화요일 이사49,1-6 요한13,21ㄴ-33.36-38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승리
-절망은 없다-
새벽 성무일도 두째번 후렴 시편이 위로와 힘이 되었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라. 의인을 주께서 붙들어 주시리라."
요즘 극단적인 대립상태에 있는 진보의 좌파와 보수의 우파를 보며 얼핏 느껴지는 소감은 좌파는 아마추어처럼 낭만적이고 방어적이며 정의롭고 순수하고 착하나, 약하고 무능해 보이고 디테일에 약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우파는 프로처럼 현실적이며 공격적이고 잡초처럼 독하고 악착스러워, 집요하고 끈질겨 생존력이 강하며 유능하고 디테일에 강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더불어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는 말도 생각납니다.
때로 선善하고 무능無能하기 보다는 악惡해도 유능有能했으면 하는 유혹도 들고, 무질서의 혼란한 선善보다는 질서의 악惡을 선택하고픈 유혹도 들곤 합니다. 이런 무지의 유혹에 빠질 때 독재자의 탄생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분별의 지혜를 위해, 또 기득권자들이나 언론의 교묘한 프레임에 빠지지 않기위해 깊고 넓고 긴 시야에 깨어 있어야함을 절감합니다.
아무리 주방장이 착해도 무능해 음식맛이 없다면 손님들은 점차 떨어질 것이고, 아무리 의사가 착해도 무능하여 환자를 잘 치료하지 못하면 환자들도 점차 떨어져 나갈 것입니다. 정말 좌파든 우파든 선善하면서도 정의롭고 유능하고 현실적이며 디테일에 강한 프로였으면 좋겠고, 분열도 부패도 없이 국정을 운영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 파스카의 영성에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겸손한 이들이라면 선하면서도 유능하고 디테일에도 강한 프로같을 것이며 분열도 부패도 적을 것입니다.
예전 김수환 추기경님의 정부 당국자들에 대한 탄식도 생각납니다.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은 힘이 없고, 힘있는 사람은 대화가 안되고---”, 대화도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이야말로 파스카의 영성을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죽음같은 겨울에서 생명같은 봄으로의 파스카의 계절, 봄입니다. 정말 전례시기에 잘 맞는 우리나라의 계절같습니다. 벌써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만개하기 시작한 무수한 봄꽃들, 살구, 매실,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등 나무꽃들에 이어 민들레, 냉이, 꽃다지, 제비꽃, 수선화 풀꽃들입니다. 모두가 겨울을 이겨낸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더없이 청초합니다. 아마 일년중 가장 꽃들이 많이 피어나는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승리를 상징하는 봄꽃들같습니다. 참으로 절망은 없음을 웅변하는 봄꽃들입니다. 늘 강조하지만 넘어지는 게 죄가 아니라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입니다. 하느님의 좋아하시는 바,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 구원의 삶입니다.
하느님 사전에 없는 단어가 절망입니다. 정말 믿는 이라면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의 삶이 아닌,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지난 성지주일 교황님도 하느님께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 감동할 수 있는 ‘놀라움의 은총’을 청하자는 요지의 강론 말씀을 하셨습니다. 놀라움의 감동을 잃고 있는 현대인들같습니다. 예전에 써놨던 시 세편을 소개합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 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2001.4.11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자리 탓하지 말자
그 어디든 뿌리 내리면 거기가 자리다
하늘만 볼 수 있으면 된다
회색빛 죽음의 벽돌들 그 좁은 틈바구니
집요히 뿌리내린
연보라빛 제비꽃들!
눈물겹도록 고맙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이구나
절망은 없다”-2001.4.18.
약해 보이나 한없이 질긴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 모두가 절망에서 희망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기쁨을 전하는 대표적 파스카의 봄꽃들입니다. 20년전 보다 무려 보름쯤은 빨라진 봄임을 깨닫습니다.
결론하여 ‘절망은 없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처지가 참으로 곤궁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말그대로 절망적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들인 열두 제자중 두 제자의 배신에 직면한 예수님은 참으로 고독하고 외로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팔아 넘길 유다가 빵을 받고 나가는 장면의 묘사가 절망 상태의 어둠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유다는 빵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때는 밤이었다.’
바로 이 어둠의 절망의 순간 터져 나오는 주님의 파스카의 승리의 환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어둠 넘어 부활의 영광을 내다보고 계십니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도 영광스럽게 되셨다.”
하느님 구원 섭리의 깊고 넓은 시야에서 전체와 부분을 조망하시는 예수님의 파스카의 시야입니다. 이런 하느님의 시야를 지니셨기에 베드로의 배신을 예고하면서도 흔들리지 않았고 유다와는 달리 그의 회심도 내다봤을 것입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가 그대로 복음의 예수님 고백처럼 들립니다. 사실 초대 교회 교우들은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고백을 그대로 파스카 예수님의 고백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 주님은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이사야서의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라는 예언 말씀이 그대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를 통해 점차 실현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결론하여 파스카 예수님의 신비를, 영성을, 기쁨을, 승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파스카의 기쁨과 승리의 삶을 살게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71,5-6ㄱㄴ).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