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여정 -회개, 겸손, 경청, 순종-2021.3.31.성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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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3.31.성주간 수요일                                                               이사50,4—9ㄴ 마태26,14-25

 

 

 

배움의 여정

-회개, 겸손, 경청, 순종-

 

 

 

어제 신문에서 읽은 ‘마음의 근시’란 컬럼 일부를 인용합니다.

 

“약 15억명이 앓는 질병이 있다. 한 번 걸리면 잘 낫지도 않는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상황이 제일 나쁜데, 인구의 약 절반이 앓고 있다. 게다가 젊은층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서울에 사는 19세 청소년의 97%가 병에 이환(병에 걸려 있음)되어 있다. 바로 근시다. 어디 눈만 그럴까? 마음도 그렇다. 근거리만 볼 수 있는 사람이 늘어나듯이, 눈앞의 일만 볼 수 있는 사람도 늘고 있다. 

 

요즘 애들이라서 유독 나약할 리도 없다. 멀리 보는 힘이 없으니, 삶의 돌부리를 보지 못하고 툭하면 걸려 넘어지는 것이다. 시야가 좁으니 맹목적으로 남을 따르기만 한다. 그러니 걸핏하면 막다른 골목이다. 마음의 근시에는 안경도 없다. 어린 시절부터 멀리 내다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눈을 위해서든, 마음을 위해서든 말이다.”(한겨레, 박한선;정신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육안의 근시도 문제지만 마음의 근시, 심안의 근시도 문제입니다. 육안의 근시와 함께 가는 마음의 근시같습니다. 예전 70년대 초등학교 아이들이 즐겨부른 ‘푸른잔디’란 애창곡이 생각납니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불러요.” 

 

그러고 보니 60-70년대 아이들은 거의 근시가 없었습니다. 어린이든 어른이든 멀리 높이 넓게 지평선이나 하늘의 흰구름이나 별들, 산능선들을 바라보는 의식적 훈련도 필요하다 싶습니다. 참고로 제가 수도원에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바라보는 것이 일출장면과 멀리 뻗은 수도원길 하늘길이요,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입니다.

 

하여 뚜렷이 부각되는 주제가 배움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평생 스승으로하여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마음의 근시는 저절로 치유되고 마음의 시야도 날로 깊어지고 넓어질 것입니다. 배움에는 끝이 없습니다. 평생 배우면서 마음의 시야를 넓혀가야 할 것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 머리말 마지막 부분의 참 깊고 아름다운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원을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다. 그러나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의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성규, 머리45-49)

 

우리 분도수도자들은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에서 평생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배우고 실천해가면서 마음의 시야를 넓혀가는 평생학인들입니다. 이런 평생 배움터의 평생학인 우리 수도자들에게 전제되는 바, 기본적인 수행이 회개, 경청, 겸손, 순종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서 참된 제자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바로 하느님의 참 좋은 제자인 예수님의 모습에 대한 묘사같습니다. 주님의 좋은 제자만이 좋은 스승도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는다.”

 

평생 이렇게 훈련, 습관된 예수님이셨을 것이며 예수님의 평생 제자들인 우리 모두에 필요한 제자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귀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잘 듣기위한 침묵이요, 이런 경청에서 회개와 순종이 뒤 따르고 내적 힘과 더불어 멀리 높고 넓고 깊이 볼 수 있는 마음의 시야도 지닐 수 있을 것이며 지친 이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랑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점에서 오늘 복음의 주님의 제자 유다는 실패했습니다. 평소 경청과 회개, 순종의 수련에 소홀하다 보니 스승인 주님께 대한 사랑과 신뢰를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마침내 마음의 시야도 급속히 협소해져 마음의 근시가 되어 탐욕의 유혹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유다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 넘긴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난 다 할지라도, 유다는 결코 배신의 책임에서 면제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저주가 아니라 스스로 배신으로 인해 자초한 저주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가 배신할 것을 예고하셨을 때,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께 물었던 질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화두입니다. 제자들 누구나 배신의 가능성이 함축된 말임을 깨닫습니다. 

 

“확실히(Surely)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참 흥미로운 것은 유다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는 것입니다. 도둑이 제 발에 저린다고 유다의 극심한 내적 불안을 반영하며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입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부정인지 긍정인지 분명치 않지만, 문맥에 따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긍정으로, “맞다. 네가 배신자임을 스스로 밝혔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새삼 마지막까지 한결같은 주님의 참된 제자로서 주님을 배신함이 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중요한 일인지 깨닫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평생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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