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0.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사도4,13-21 마르16,9-15
복음 선포의 삶
-갈망, 만남, 선포-
계속되는 파스카의 봄꽃들 만발한 주님 부활 축제 시기입니다. 예전보다 십일쯤 빨리 동시에 만개한 봄꽃들입니다. 요셉 수도원에도 배꽃들 만발하다는 소식입니다. 겨울을 이겨낸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한결같이 청초한 아름다움입니다. 우리나라 어디나 곳곳에 활짝 핀 새하얀 산벚꽃들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듯 합니다.
파스카의 봄꽃들과 더불어 신록의 나뭇잎들 역시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아름다움, 신록의 기쁨을 노래하는 듯 합니다. 얼마전 어느 분과 주고 받은 카톡 메시지입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후 대구에 내려 왔는데 벚꽃은 다 지고 음지에도 철쭉이 모두 피었네요.”
“아, 어디나 봄꽃들 만발하니 어디나 하느님 계신 하늘 나라네요!”
그렇습니다. 파스카의 봄꽃들 만발한 오늘 지금 여기가 파스카의 주님이 계신 하늘 나라입니다. 만발한 봄꽃들은 그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는 영혼들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을 선포하는 복음 선포의 삶은 우리 모두의 존재이유이자 의무입니다. 성전 층계를 오르 내릴 때 마다 마음에 강렬히 와 닿는 글귀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
주님 성체와의 결합이 깊어질수록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순교적 삶이요 이런 삶 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 선포도 없을 것입니다. 무아의 집 식당에 걸려 있는 순교복자수녀회의 창립자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님 사진과 더불어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사랑하옵신 주께로 향한 침묵대월은 내 일생 모든 날에 유일한 낙이로세.”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이 내 사랑의 모두가 될 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삶일 것입니다. 제 행복기도중 참 많이도 인용했던, 인용할 때마다 늘 새로웠던 대목이 생각납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모두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파스카의 하루이옵니다.”
이런 고백대로의 삶이라면 그대로 참 아름다운 복음 선포의 삶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인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의 유언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이 복음 선포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멀리 갈 것 없습니다.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요 복음 선포의 자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사랑, 파스카의 기쁨을 살고 나누는 것입니다. 어떻게? 바로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갈망하십시오.
하느님을, 파스카의 주님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갈망의 사람,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자의 정의입니다. 갈망은 영성생활의 원동력입니다. 갈망의 불이 꺼지면 영성생활은 끝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 바로 수도생활의 정의입니다. 사랑의 갈망, 사랑의 목마름, 사랑의 그리움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 중 계속되는 감미로운 시편 첫 구절, 얼마나 많이 고백했는지요!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따,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어제 말씀드렸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고백이 참 기발합니다. 우리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목말라 하신다는, 그리워하신다는 고백입니다. 우리의 근원적 ‘외로움’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주님께 대한 ‘그리움’뿐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용기백배하여 하느님을, 파스카의 주님을 갈망하는 사랑으로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둘째,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주님을 찾는 항구한 갈망이 있을 때 만남의 은총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들 대부분이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의 이야기들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 주님과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정화되고 성화되는 우리들입니다.
만남의 은총입니다. 복음에서 보다시피 참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사도들중의 사도라 칭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주간 첫날 새벽에 만나 주신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참 아름다운 도반의 모범인,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와 애제자 요한 역시 유다 지도자들을 놀라게 했으니 바로 제1독서 사도행전 서두의 다음 대목이 그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지식공부 많이 해서가 아니라 두 사도처럼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은총으로 누구나 담대할 수 있고 관상가나 신비가가 될 수 있습니다. 삶의 지혜에 성덕을 지닐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녔어도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무지의 어둠 속에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빛만이 무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이런 주님을 모르는 똑똑한 바보들인 무지의 사람들이 널려 있는 세상이 아닙니까! 지난 4월7일 보궐선거의 결과만을 봐도 얼마나 많이들 탐욕의 무지에 눈먼 세상인지---, 분별력의 상실을, 변질된 민심을 단순히 민심이 천심이라 치부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는 ‘망각忘却의 병’이 문제인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압도하는 탐욕의 바이러스입니다.
한 두 번 주님과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평생 새롭게 파스카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곧 잊어버려 복음의 열한 제자들처럼 굳어 완고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다음 주님께 호된 꾸중을 듣는, 주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열한 제자들 그대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셋째, 파스카의 주님을, 복음을 선포하는 삶입니다.
비상한 복음 선포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의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바로 제 삶의 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 때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날로 주님을 사랑하여 주님을 닮아갈 때 그 삶자체가 그대로 복음선포입니다. 바로 각자 제자리에서 만발한 파스카의 봄꽃들이 상징하는 바,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주님 성체와의 일치로 나날이 겸손과 섬김의 사랑에, 순교적 삶에 항구할 때 저절로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복음 선포 활약상이 눈부십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 하나되었기에 이런 분별의 지혜에 확신에 넘치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일로 백성이 모두 하느님을 찬양했으니 그대로 두 사도의 성공적 복음 선포의 삶임을 증거합니다.
참 기쁨과 행복은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을, 복음을 선포하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니 1.주님을 갈망하십시오, 2.주님을 만나십시오. 3.주님을 선포하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공적 복음 선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