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11.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사도4,32-35 1요한5,1-6 요한20,19-31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님 사랑, 공동체 사랑, 주님의 전사-
오늘은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예수님의 간곡한 당부도 자비하신 하느님 아버지처럼 우리 모두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평생과제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며, 평생공부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공부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참 절박한 물음이요 제 고뇌의 산물입니다. 답답할 때는 이렇게 묻고 말씀에서 간절히 답을 찾아 봅니다. 요즘 나라 사정이 안팎으로, 코로나로 인해 참 어렵습니다. 말그대로 내우외환입니다. 사실 늘 그래왔습니다. 정말 밖의 적이 아니라 안의 적이 문제입니다. 나라든 공동체든 개인이든 거의 대부분 밖의 침략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안의 분열이나 부패로 망했습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수녀님이 무심코 던진 화두같은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누구나의 바램일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우선 내가 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참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말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기 위해(to do)’ 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위해(to be)’ 수도원에 왔다.”고 말입니다. 정말 요즘같은 어지럽고 빠르게 변하는 혼란한 세상에서는 참 사람되는 공부보다 더 중요하고 힘든 일도 없을 것입니다. 세속에 오염 중독 변질되어 괴물이, 폐인이, 광인이 되는 일도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물음은 “어떻게 참사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라는 물음과 같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평생공부요 그 구체적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자비의 화신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사랑하여 닮아갈 때 비로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진리에 대한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한다면 공부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아가는 공부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할 때 알아가는 공부요 더불어 예수님을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가면서 참 내가 되는 것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 되고 중심이자 의미가 되는 분입니다. 영원한 참 사람의 모델이 바로 이런 예수님이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벽은, 닫힌 문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시면 우리 마음의 벽은 활짝 열린 문으로 바뀌며 참 좋은 선물인 평화가, 그리고 기쁨이 선사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어지는 자비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평화와 기쁨입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토마스는 감격에 넘쳐 성령의 영감을 받아 예수님을 하느님이라 고백합니다. 토마스는 보고 믿었지만 보지 않고도 믿는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을 증언하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더 나아가 하느님이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례성사의 물과 성체성사의 피로 이미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하나된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이런 주님께 대한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합니다. 하여 세상의 빛이, 세상의 소금이 되어 살게 하며, 세상에 속화俗化되지 않고 세상을 성화聖化시킵니다.
둘째, 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멀리 갈 것 없이 구체적으로 내 몸담고 있는 하느님의 선물인 공동체를,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을 주님을 사랑하듯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의 몸이고 형제자매들은 그 한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사람들이요 신원의식도 정체성도 잃기 십중팔구입니다. 참으로 자비하신 아버지의 품같은 배경의 공동체에 감사해야 하고 이런 공동체 건설에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어제 ‘무아無我의 집’을 에워싸고 있는 품같은 배경의 태령산 기슭,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생각난 글입니다.
“산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크고 깊고 고요한 배경의 품, 산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부활하신 주님의 참 좋은 선물이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며, 단번에 완성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과 우리의 노력이 합력하여 완성을 향해가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순례 공동체입니다.
바로 이런 아가페 사랑 가득한 이상적 유토피아의 선물 공동체가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 공동체입니다. 바로 우리 수도공동체를 통해 실현되기 시작한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의 선물 공동체인지 그대로 인용합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팔아서 받은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 발 앞에 놓고,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
말 그대로 하느님 자비의 공동체, 아가페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바로 여기서 태어난 사생아 같은 존재가 공산주의입니다. 공동체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자발적 사랑의 유토피아 공동체의 원형이 바로 사도행전 공동체입니다. 그대로 무상복지, 보편복지가 실현된 모습이요, 국가공동체가, 인류공동체가 궁극으로 지향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늘나라 유토피아 공동체는 세상에 닫힌 폐쇠적 공동체가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린 세상의 빛, 세상의 소금, 세상의 누룩같은 공동체입니다. 앞문은 세상에 뒷문은 사막에 활짝 열린 이상적인 유토피아 하늘나라 수도공동체를 염원하며 쓴 고백의 글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歡待)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親交)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셋째, 주님의 전사(戰士)로 사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로 시작하는 주님의 전사, 파스카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그대로 치열한 생존경쟁의, 각자도생의 전쟁터입니다.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계층 간의 갈등과 대립의 끊임없는 전쟁상태입니다. 총칼만 안들었지 주고 받는 언행은 얼마나 험악하고 분노와 증오에 차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은 영적전쟁이요 우리는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기도의 전사, 말씀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에 우리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입니다. 주님의 전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와 훈련에 전념해야 합니다. 사실 내적 부패와 분열로 무너지면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결코 영적전쟁에 승리할 수 없습니다. 다음 말씀대로 세상에 주님의 전사로, 일꾼으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당신 은총으로 가득 채워 주신 후 당신 평화의 전사, 성령의 전사, 용서의 전사로 세상 삶의 제자리로 파견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답은 분명해졌습니다. 평생 주님을 사랑하고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결같이, 항구히, 열렬히 1.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공동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3.주님의 전사戰士로, 용사勇士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