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하신 예수님 중심의 삶 -관계의 깊이-2021.4.24.부활 제3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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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4.24.부활 제3주간 토요일                                                          사도9,31-42 요한6,60ㄴ-69

 

 

 

부활하신 예수님 중심의 삶

-관계의 깊이-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새삼 마음 깊이 와 닿았습니다. 얼마나 부활하신 주님과 깊은 사랑의 일치 관계에 있는 바오로 사도인 지 깨닫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서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14,8-9)

 

평범한 진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다 시들어 죽어가 버릴까 하던 집무실의 화분안 화초가 물을 흠뻑 주니 얼마 지나 싱싱하게 살아났습니다. 예전 주교님의 대림 강론때 들었던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기도는 영혼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물을 주지 않아 시들어 죽은 화초와 같이 영혼도 기도하지 않으면 시들어 죽는다. 또 기도는 만남과 같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만나지 않으면 점점 멀어지기 마련이듯 하느님 역시 기도를 통해 자주 만나지 않으면 점점 멀어져 잊혀진다.”

 

너무 평범하고 자명한 진리요, 주님과의 관계에 있는 영혼도 똑같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해야 살아나는 영혼이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만날 때 날로 깊어지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제는 사랑의 이중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필히 자연사랑이 더해져 사랑의 삼중계명이 되어야 할 절박한 시점같습니다. 기후위기에 대한 교황님의 우려 가득한 발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제51차 지구의 날이었고 어제는 일간신문의 톱기사도 기후문제 였으며 기후 정상 회의에 관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교황님이 보낸 메시지의 몇부분 말씀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구를 지키기 위한 공동협력을 강조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이 선물인 자연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우리의 관심사는 환경을 더 깨끗이, 더 순수하게 보존하는 것이다. 환경이 우리를 돌볼 수 있도록 우리가 환경을 돌봐야 한다. 올해의 주제는 지구를 회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단을 갖고 있다. 바야흐로 행동해야 할 시간이다. 우리는 한계에 직면해 있다. 스페인 속담이 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시고, 사람들은 때때로 용서하나, 자연은 결코 더 이상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의 지구위기는 더 좋아지든지, 혹은 더 나빠져 자기 파괴의 파국의 길을 가든지 둘 중 하나다.”

 

사랑은 관계입니다. 관계의 깊이를 드러내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사랑의 깊이는 다 다릅니다. 하느님과 이웃은 물론 주변 자연과의 관계도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였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자연을 함부로 마구 착취하고 다루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기는 정말 힘든 세상입니다.

 

그러나 관계중의 관계는, 관계의 기초는, 모든 관계의 열쇠는 우리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과의 깊어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함께 가는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요 성체성사적 삶의 완성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은 우리 삶의 살아 있는 중심입니다. 이런 삶의 중심 예수님께 깊이 믿음과 사랑의 뿌리를 내려가는 우리 분도수도자들의 빛나는 정주서원입니다. 날로 깊이 예수님 중심에 깊이 사랑의 뿌리, 믿음의 뿌리 내릴수록 작금의 신록의 아름다운 부활시기처럼 늘 푸른 신록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주님께 믿음의 뿌리가 약했던 이들은 뿔뿔히 다 흩어져 떠났고 믿음의 뿌리가 깊었던 베드로를 위시한 열한 제자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새삼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영이 없는 육은 정말 쓸모가 없습니다. 육에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하여 영화靈化된 육, 육화肉化된 영이라 말하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자 빛입니다. 생명과 빛을 주는 영입니다. 그러니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과 믿음에 결정적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말씀입니다. 주님 사랑과 함께 가는 말씀 사랑이요 더불어 말씀의 영과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보다 영육의 건강에 좋은 영약靈藥은 없습니다. 

 

어제는 바오로가 회심을 통해 우리에게 감동을 선사했는데 오늘은 베드로가 신앙고백으로 감동을 선사합니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물었을 때 이들을 대표한 시몬 베드로의 답변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의 답에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 중심에 깊이 뿌리 내린 베드도의 믿음이자 사랑인지 깨닫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정답正答이자 명답名答으로 이것 하나뿐입니다. 살아갈수록 갈곳은 주님의 집 하나뿐이요, 살아갈수록 만날 분은 주님 하나뿐임을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우리의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의 갈증을 해결해 줄 분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지닌 우리 영혼의 고향과 같은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마디는 믿어왔고 알고 있다는 두 말마디입니다. ‘믿다’와 ‘알다’ 둘 다 희랍어로 현재형입니다. 바로 고정된 믿음이나 앎이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과 깊어지는 관계중에 있는 믿음이요 앎이라는 것입니다. 날로 깊어지는 믿음의 여정, 앎의 여정을 통해 주님과의 일치도 날로 깊어질 것이며 저절로 치유와 구원의 열매입니다.

 

바로 이런 부활하신 주님과 일치의 모범이 베드로요 오늘 제1독서 사도행전에서 치유의 구원 행위를 통해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베푸신 치유와 구원의 은총입니다. 베드로는 중풍에 걸려 팔 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있던 애네아스를 향해 말합니다.

 

“애네아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고쳐 주십니다. 일어나 침상을 정돈하십시오.”

그러자 곧 애네아스는 일어납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치유되고 구원받아 부활한 애네아스입니다. 이어 베드로는 죽은 타비타 시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 드린 다음 시신쪽을 향해 명령합니다.

“타비타, 일어나시오.”

 

앞서와 똑같이 ‘일어나라’ 하십니다. ‘일어나다(아니스테미)’는 루카가 예수님 부활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동사입니다. 그러자 타비타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앉습니다.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 타비타를 부활시키신 것입니다. 넘어졌을 때마다 ‘일어나시오.’ 주님의 명령에 심기일전 곧장 일어나 부활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를 통해 애네아스와 타비타를 치유하시고 살리신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며, 당신과 믿음과 사랑의 관계도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내게 베푸신 모든 은혜,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구원의 잔 받들고, 주님의 이름 부르리라.”(시편116,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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