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심판 -말씀 예찬: 영이자 생명이요 빛이신 말씀-2021.4.28.부활 제4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pr 28,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1.4.28.부활 제4주간 수요일                                                   사도12,24-13,5ㄱ 요한12,44-50

 

 

 

말씀의 심판

-말씀 예찬: 영이자 생명이요 빛이신 말씀-

 

 

 

어제의 작지만 아주 소중한 깨달음의 체험을 잊지 못합니다. 예전 선물받은 자그마한 고아古雅하고 품위있는 도자기같은 잔입니다. 밤 1시쯤 일어나면 대충 씻고 정원을 세 바퀴 돌고 맨손체조후 집무실에 들어와 이 잔으로 맥심 1회용 커피 한잔 하고 강론을 씁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어제 착한 보물같은 두 자매가 월모임이 코로나로 취소된 까닭에 잠시 들려 집무실 청소를 말끔히 해 준후 강론 말씀 나눔 뒤에 강복을 받고 떠난 다음, 집무실을 살펴보는 중에 커피 잔 없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언젠가 나오겠지 하고 포기했지만 자꾸 생각나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어 자매에게 카톡 메시지를 전송했고 이어 주고 받은 내용들입니다.

 

-“혹시 작은 도자기같은 남색 비슷한 커피 잔 치우셨는지요?”

“네, 함께 한 자매가 이가 빠졌다고 버린다고---신부님 찾으셨어요? 신부님 사무실에서 마리아의 집으로 다 오셔서 오른쪽 작은 피정의 집에 휴지통중에 일반쓰레기통에 넣었어요.”

“예, 찾아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죄송해요! 신부님께 소중한 것을 이가 빠졌다고---신부님, 사랑합니다.”

“이 또한 저에겐 새삼스런 좋은 깨우침이 되네요!”

“네, 신부님! 저도 깨달았습니다. 맘이 순간 아득했습니다. 추억의 소중한 물건을--- 겉으로 보는 판단이 아니 진정한 소중함을 몰랐습니다.”-

 

다른 자매도 연락을 듣고 몹시 미안해 하며 메시지를 보냈고 이어진 내용들입니다.

-“에고, 신부님, 죄송해요, 컵안에 줄들이 생겨서--- 신부님께 말씀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신부님께 귀한 것임을 미처 생각 못했어요.”

“좋은 마음으로 하셨으니 괜찮습니다! 아무튼 좋은 깨우침이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아유, 신부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신부님 덕분에 귀한 배움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는 우리 하나하나가 이런 소중한 잔과 같겠다 싶었습니다. 알리지 말까 하다가 알린 것이 정말 귀한 깨우침의 기회가 됐으니 전화위복이 된 느낌입니다. 작은 찻잔도 이처럼 소중한 데 참 소중한 주님을, 주님의 말씀을 까맣게 잊고 지내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간혹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 하다가 이름이 생각났을 때, 또 적절한 어휘가 생각나지 않아 답답해 하다가 어휘가 생각났을 때 얼마나 반갑던지 체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잊으면 곧장 찾아내야 하는 것이 주님이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소리로 또는 노래로 찬미와 감사 말씀의 성무일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입니다. 끊임없이 깨어 말씀으로 바치는 기도보다 치매 예방에도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말씀은 존재의 집입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은 영혼의 밥이자 숨이자 영이자 생명이자 빛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주는 영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정화하고 성화하고 치유하고 위로하며 우리의 꼴을 형성합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고백입니다. 오늘 복음으로써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도 끝을 맺습니다. 요한복음의 첫째 부분의 맺음말 구실을 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나는 빛으로써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나는 그분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것이다.”

 

새삼 말씀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의 심판입니다. 하느님이 내리시는 구원이나 심판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이요 거부하면 심판이니 말 그대로 말씀의 심판입니다. 그러니 이런 심판은 죽어서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마음이 환해지는 것, 바로 지상에서의 구체적 구원체험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이신 주님을 잊어 버리는 것보다 결정적인 실패 인생도 없습니다.  주님과의 만남과 일치도 말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말씀의 빛이 무지와 무의미, 허무와 절망의 어둠을 몰아내어 빛 속에 빛의 자녀되어 살게 합니다. 아주 예전에 써놨던 ‘개나리’란 시가 생각납니다. ‘미나리’ 영화 제목처럼 반갑고 정다운 순 우리말 ‘개나리’입니다.

 

“겨울 지낸 

개나리

햇빛 환한 

봄날도 

너무 어두워

 

샛노란 꽃 초롱들 

가득 켜들고

대낮의 어둠 

환히 밝히고 있다”-2001.4.11

 

꼭 그렇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산수유, 의사리, 민들레, 개나리, 수선화, 황매화꽃 등 파스카 봄꽃들은 샛노란 빛깔인가 봅니다. 세상의 빛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 빠진 대낮의 어둠같은 현대문명입니다. 대낮의 어둠을,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는 빛의 사람, 말씀의 사람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파스카의 축제 계절, 신록과 더불어 만개한 다양하고 무수한 4월의 꽃들은 그대로 ‘말씀의 꽃’으로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그러니 믿는 이들에게는 끝은 없고 영원히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이 끝나자 이어 사도행전의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수님의 바톤을 이어 받아 말씀 선포를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처음도 마지막도 초점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바르나바와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사명을 수행한 다음,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을 데리고 돌아갔다.---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 살라미스에 이르러 유다인들의 여러 회당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말씀으로 시작하여 말씀으로 끝나는 사도들의 일과입니다. 새삼 우리 믿는 모두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모두이자 존재이유요, 고귀한 인간 품위의 삶도 말씀이신 주님과의 일치에서 이뤄짐을 깨닫습니다. 영육의 건강에 말씀의 식食과 약藥보다 더 결정적인 처방은 없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과의 일치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주님 찬양하라, 내 영혼아, 힌평생 주님을 찬미하라. 이 생명 다하도록 내 하느님 기리리라."(시편146,1-2). 아멘.

 


Articles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