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4.29.목요일 시에나의 성녀 카타니라 동정 학자(1347-1380) 기념일
사도13,13-25 요한13,16-20
섬김의 사랑, 섬김의 여정, 섬김의 학교
-성덕의 잣대-
사랑하는 하느님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선물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사랑과 정성 가득 담아 이른 새벽 가장 먼저 써 올리는 새벽 매일의 제 강론입니다. 이 또한 저에겐 참 행복이요 기쁨이자 감사요, 섬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 섬김의 여정, 섬김의 학교---줄줄이 이어집니다. 섬김이야말로 성덕의 잣대, 참된 영성의 잣대입니다.
주님 부활 파스카 축제의 계절에 수도원 곳곳에서 줄줄이 피어나는 꽃들의 향연饗宴입니다. 아마 일년중 가장 꽃들이 많이 피어나는 때 같습니다. 공기도 꽃향기로 가득합니다. 흡사 땅이 하늘이 된 듯 황홀찬란합니다.
요즘 수도원 경내는 물론 배밭에 널려있는 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피어난 ‘엄마의 사랑과 정성’이란 예쁜 꽃말을 지닌 노오란 애기똥풀꽃들이 절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흡사 섬김의 사랑으로, 섬김의 겸손으로 피어난 꽃처럼 보입니다.
-“고목
배나무 아래
섬김의
낮은 자리
노오란
위로의
눈물같은
애기똥풀꽃”-2021.4.28.
어제 써놓은 시에 이어 무려 23년전 아주 예전에 써놓고 즐겨 애송하며 나눴던 ‘검정 고무신’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도 돌보고 가꿔주지 않아도 때되면 즐비하게 피어나는 애기똥풀꽃 사랑이 참 고맙습니다.
-“볼 품없는
검정 고무신
애기똥풀꽃밭에
다녀오더니
꽃신이 되었다
하늘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수놓은
꽃신이 되었다
노오란 꽃잎 별 떠오른
꽃신이 되었다.”-1998.5.7
섬김의 대명사 같은 검정 고무신 같은 겸손한 사랑의 존재에 하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상징하는 시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예화에 이어지는 내용들입니다. 섬기는 사랑, 겸손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주인의 발을 씻어주는 종들이 하는 일을 우리 주님께서 몸소 하신 것입니다. 이어 제자들에게도 거듭 당신처럼 섬김의 사랑, 섬김의 겸손, 섬김의 환대를 실천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주님처럼 섬김의 사랑과 겸손을 솔선수범하는 자는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섬김의 중심에 자리잡고 계시는 섬김의 모범이신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바로 이를 깨달아 사는 이들이 건강하고 온전한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저멀리 밖에서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모든 이들을 통해 만나는 예수님이요 하느님입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을 섬김의 환대로 맞이할 때 예수님을,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것이란 놀라운 진리를 보여줍니다. 섬김의 사랑은 비상하거나 놀랍지 않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덕담을 통해서도 실천됩니다.
-“하느님의 시詩가 걸어가는 것 같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님!”
사랑의 덕담에,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시 제목으로 웃으며 응답한 안토니오 수사입니다. 마침 작약꽃이 아름다워 지인에게 사진과 더불어 곁들여 보낸 덕담의 메시지입니다. 꽃보다 봉오리가 더 신비롭고 아름답게 보이니 흡사 ‘겸손의 미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작약꽃보다 더 예쁜 사랑하는 자매님! 꽃선물 받으세요.”
“아! 너무 예뻐요. ㅎㅎ 신부님, 저에게 보내 주시는 선물은 하느님의 선물같이 느껴집니다. 환한 미소가 신부님을 닮았네요. 오늘은 행복하네요. 감사합니다. 신부님!”-
이 또한 섬기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행복’하니 엊그제(4.27일 오후10:15분) 선종하신 고故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1931-2021)의 마지막 당부 유언같은 말씀도 그대로 섬기는 사랑의 표현처럼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행복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정추기경은 마지막 순간까지 찾아온 추기경과 주교들, 사제들에게 미안하다고 하시며 겸손과 배려와 인내를 보여 주시며 선종하셨다 합니다. 만 90세를 사셨으니 카타리나 성녀보다 무려 거의 3배를 산 정추기경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믿는 이들의 권리이자 의무요 책임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입니다. 주님께 갔을 때 주님의 물음도 “너는 행복하게 살았는가?” 하나일 것입니다. 무지로 몰라서 불평이요 원망이지 참으로 깨달아 알면 저절로 샘솟는 찬미와 감사입니다. 분도 성인도 당신 수도원을 주님을 섬기는 학교라 정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학교를 설립해야 하겠다. 우리는 이것을 설립하는 데 거칠고 힘든 것은 아무것도 제정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바이다. 그러니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말아라.”(성규, 머리말 45-47)
비단 분도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 또한 나름대로 각자 섬김의 배움터인 섬김의 학교에서 평생 섬김의 여정을 살아갑니다. 섬김의 사랑은 성덕의 잣대이자 참된 영성의 잣대입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입니다. 결코 비상한 성덕도 영성도 아닙니다. 오래 많이 살았다 하여 성덕도 성인도 아닙니다. 젊어도 뛰어난 섬김의 사랑을 지녔으면 나이에 상관없이 존경받아져야 마땅합니다.
오늘 고작 33세에 선종한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 동정 학자의 섬김의 사랑과 삶도 우리를 감동케합니다. 섬김의 사랑으로 자신을 완전 연소시켜 선종한 섬김의 순교같은 죽음입니다. 성녀보다 2배를 훨씬 넘어선 제 자신을 참 부끄럽게 하는 성녀의 섬김의 성덕입니다. 분도 성인 또한 아빠스가 되는 것도 나이에 관계없이 성덕이 그 잣대임을 보여줍니다.
“아빠스로 세워질 사람은, 비록 공동체의 차례에는 마지막 자리에 있더라도, 생활의 공덕과 지혜의 학식을 따라 선출되어야 한다.”
고故 이형우 시몬 베드로 아빠스의 선종시 상본 ‘서로 섬기자’라는 성구와 더불어 아빠스로 선출되었을 때 자칭 ‘하느님의 심부름꾼’이라 말씀하시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나이에 상관없이 공동체에서 제일 심부름 잘하는 명민明敏하고 지혜롭고 사랑 많은 섬김의 사람을 장상으로 모신 공동체는 복된 공동체입니다.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 조연상을 탄 윤여정 배우가 극찬한 감독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영화는 감독이다. 감독이 매우 중요하다.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바닥까지 아울러야 한다.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힘이다. 정이삭 감독은 늙어서 만났는데 나보다 너무 어리고 아들보다 어리지만 어떻게 이렇게 차분한지 모르겠다. 현장에서는 수십명을 통제하려면 미치는데 차분하게 통제하는데 아무도 누구를 업신여기지 않고 존중하더라. 미국에서 굉장히 세련된 한국인이 나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좋았다. 43세 먹은 정이삭 감독에게 존경한다고 말했다.”
우리 삶 역시 종합예술입니다. 내 삶의 명감독이 될 수 있는 길은 섬김의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수님처럼 섬김의 대가이자 달인이 된다면 내 삶의 최고의 명감독일 것입니다. 바로 이런 섬김의 달인達人이 성인입니다. 제1독서의 말씀의 봉사자 바오로 사도가 섬김의 달인입니다. 제1차 전도여행에 오른, 지칠줄 모르는 바오로 사도의 섬김의 열정이, 활약이 놀랍고 눈부십니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다 신자들을 회당에 모아서 구세사를 상기시키는 바오로입니다. 구세사의 결론으로 구원자 예수님을 소개함으로 끝을 맺습니다.
더불어 생각해야 할 내 삶의 역사입니다. 과연 예수님을 닮아 섬김의 여정, 섬김의 역사를 살았는지 섬김의 관점에서 각자 삶의 성서와 같은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섬김의 여정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당신을 닮은 겸손과 환대의 섬김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