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7.부활 제5주간 금요일 사도15,22-31 요한15,12-17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과 우정(友情)의 여정-
관상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코로나 사태는 바로 삶의 관상적 차원을, 사랑을 회복하라는 표징이기도 합니다. 멈추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라는 것입니다. 코이노니아 잡지 46호에서 읽은 코로나 시대의 메시지 셋에 대한 상징적 해석도 재미있었습니다. ‘마스크 쓰기:침묵하라!, 거리두기:고독하라!, 손씻기:회개하라!’ 바로 삶의 깊이에서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사랑의 메시지, 고독과 침묵, 회개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좋은 손님은 빈손으로 와도 반가워 무엇이든 주고 싶습니다. 얼마전 빈손으로 방문해 미안해 하는 분에게 ‘형제님 자체가 참 좋은 선물’이라며 격려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예수님과 좋은 사랑과 신뢰 관계의 우정을 지닌 이들이라면 예수님께서도 빈손으로 와도 반가워할 것이며 오히려 큰 상급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 갈 때 우리가 갖고 갈 것은 주님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관계 하나뿐일 것입니다. 진정 행복하고 자유롭고 지혜로운 내적부자는 예수님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 관계를 날로 깊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시간에 교황님께서 주신 ‘관상기도; 사랑의 길 안내자’란 내용도 참 평이하면서도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약간 길다싶지만 많은 부분 인용합니다.
-“모든 인간이 우리 일상에 맛을 주는 소금과도 같은 관상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짹짹 지저귀는 새들을, 떠오르는 태양을, 예술과 음악을 관상할 수 있다. 관상한다는 것은 주로 ‘행위의 길’이 아니라 ‘존재의 길’이다. 관상은 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의존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우리의 시선을 선명하게 하며 다른 각도에서 삶의 실재를 파악하게 한다. 관상은 시선을 예수님께 고정시키는 믿음의 응시凝視이다. 모든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그때 실재는 다른 시선으로 관상된다. 그리스도님께 대한 사랑의 관상은 적은 말마디를 요구한다. 단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본다!’
응시만으로 충분하다. 우리 삶은 그 무엇도 우리를 떼어 낼 수 없는 무한하고 신뢰 가득한 사랑으로 에워싸여 있다는 확신만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은 이런 ‘응시의 대가大家’로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 안에 머무는 시간과 장소를 발견하신다. 관상은 활동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과거 어떤 영적 스승들은 유감스럽게도 관상과 활동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를 지녔다.
실제 관상과 활동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복음에서 유일하고도 위대한 부르심은 사랑의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의 절정이자 핵심이다. 이런면에서 애덕과 관상은 동의어이다. 그들은 똑같은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신비가들이자 관상기도의 대가들중 한 분인 십자가의 성 요한을 가르침을 생각해 보자.
‘순수한 사랑의 작은 행위가 다른 모든 활동보다 교회에는 더 유익하다. 겸손에 의해 정화된, 우리 에고(ego)의 추정(推定;추측해서 판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닌 이런 기도로부터 나온 것은 비록 사랑의 숨겨진 침묵의 행위일지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기적(miracle)이다.’”-
관상은 사랑입니다. 비상한 관상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사랑의 관상입니다. 사랑의 관상가들에게는 삶은 온통 하느님 사랑의 기적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 사랑의 관상가가, 관상기도의 대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분명히 각인되는 주님의 세 귀한 말마디입니다.
1.“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바로 우리 사랑의 잣대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를,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무사한 사랑, 생명을 주는 사랑, 집착함이 없는 사랑, 자유롭게 하는 사랑, 말그대로 순수한 아기페 사랑입니다. 이런 결정적 모범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2.“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아브라함과 모세가 하느님의 친구라 불렸듯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가 된다는 복음입니다. 얼마나 가슴 설레게 하는 행복한 말씀인지요! 주님이자 스승이자 동시에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친구가 될 때 진짜 관상가요 관상기도의 대가가 됩니다.
외로움, 그리움은 말끔히 사라지고 늘 충만한 기쁨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원한 길벗이자 도반道伴이신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중인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우정의 여정은 그대로 관상의 여정, 사랑의 여정이 됩니다.
3.“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성소의 신비입니다. 성소는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내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황송하게도 나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결코 우열이나 호오를 비교할 수 없는 고유의 성소입니다. 내 성소만이 아니라 형제들의 성소도 존중하고 지켜줘야 합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주님과 관상의 여정, 사랑의 여정, 우정의 여정,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이요, 길이 남는 사랑의 열매,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대로 하늘에 쌓은 보물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관상의 일치와 더불어 우리 뜻은 그대로 하느님의 뜻이 될 것이고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그대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답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의 관상가,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무사(無私 無邪)’한 눈밝은 아가페 사랑은 그대로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오늘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에 의해 결정된 사항은 그대로 분별의 지혜와 사랑입니다. 잠시 언급되는 다음 대목이 감동입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는 진정 예수님의 친구이며 관상의 대가임을 깨닫게 합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입니다.”
목숨을 내놓고 바둑을 뒀다는 왕년의 바둑 고수 조치훈이, 목숨을 내놓고 축구를 했다는 왕년의 축구 스타 박지성처럼, 예수님 사랑에 목숨을 내놓은 예수님의 친구들인 사도들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관상의 대가 사도들의 사랑의 결정은 얼마나 정중하고 품위있고 멋진지요. 부수적인 무거운 짐들은 말끔히 정리해 주고 짐들을 단순화, 최소화하여 본질적은 필수 요소만 남깁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티오키아 교회 공동체는 격려 말씀에 크게 기뻐하며 고무되었다 합니다. 짐을 덜어주는 지혜로운 사랑 역시 아가페 순수한 사랑이겠습니다. 문득 어제 받은 메시지가 재미있어 나눕니다.
“우리 총원장 수녀님 축일 미사후, ‘늙을수록 아름다운 호박이 되겠다’는 말씀에 모두 감명받고 격려의 박수를 쳤습니다.”
‘늙을수록 아름다운 호박’이란 말마디에서 사랑으로 잘 익어가는 참 아름다운 관상가의 진면목을 보는 듯 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주님과 우정의 여정을 축복해 주시며 날로 당신과 사랑과 신뢰의 우정을 깊게 해 주십니다. 주님의 결론같은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