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5.16.주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주일)
사도1,1-11 에페1,17-23 마르16,15-20ㄴ
승천의 순례 여정
-희망, 깨달음, 복음선포-
오늘은 부활 제7주일이자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매일이 주님 승천 대축일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사실 참으로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매일이 부활 대축일이자 승천 대축일입니다. 이런 축제를 지낼 수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전례 축제없이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팍팍한 사막같은 현실 너머 천국을 내다 볼 수 있게 하는 전례 축제는 그대로 영혼의 샘터가, 쉼터가, 배움터가 됩니다.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때만 되면 떠오르는 모두가 흥겹게 승천의 희망과 기쁨중에 노래했던 “환호소리 나는 중에 하느님 오르시도다- 하느님 오르시도다”화답송 시편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노래 못한지도 벌써 두 해째입니다.
어제는 성 빠코미오 아빠스 기념일이자 스승의 날이었고, 저는 주님 승천 대축일에 앞서 스승의 날에 참 좋은 분들을 통해 감동적인 선물을 받았으니 이 또한 주님의 은총입니다. 자랑을 좋아하는 사람을 일컬어 ‘팔불출八不出’이라 한다는데 이를 무릅쓰고 약간 길다 싶지만 우선 자랑부터 한 후 본격적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매일 일찍 일어나기에 끝기도가 끝나면 기진맥진 상태인데 마침 낯익은 착하고 열심한 아름다운 자매님들 네분이 미사신청겸 집무실에 잠시 들렸다 ‘스승의 은혜’를 참 고운 목소리로 정성껏 불러 주어 감동했습니다. 두둥실 하늘에 떠오르는 승천의 기쁨 가득한 분위기 였습니다. 즉시 사진에 담아 잠자기 전 메시지와 함께 전송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매님들! 스승의 은혜! 노래 선물 너무 너무 감사, 감동입니다! 예수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인사 받으시고 행복하세요!”
스승의 은혜, 3절까지 불러 주었고 구구절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제 1절은 ‘스승’을 ‘주님’으로 바꿔 산책중 여러번 불러 보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스승은 주님이신 예수님뿐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주님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주님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주님의 은혜”
이어 40여년전 그러니까 지금은 50대 중반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제자들 셋으로부터의 친필 편지와 더불어 메시지에도 감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 올립니다. 이렇게 선생님께 편지를 써본지가 6학년때 써보고 41년 만에 처음이네요. 선생님 제자임이 항상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은혜에 감사드리며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셔서 함께 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선생님,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 멀리서 킥서비스로 보낸 축하선물 떡상자 안에 있던 편지글 일부입니다. 이어지는 두편의 메시지 편지글도 소개합니다.
“선생임, 저 은경이예요. 스승의 날에 못 뵈어서 죄송합니다. 마음은 굴뚝 같으나 여의치 않아 못 가 뵈었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선생님을 만났고 저도 선생님으로 불리고 있지만, 진정 선생님으로 생각나는 분은 이수철 선생님밖에 없네요. 그만큼 철없고 어린 저에게 따뜻하고 자상하게 대해 주신, 참으로 소중하게 기억되는 분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사랑하는 선생님, 스승의 날 축하드립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큰 관심과 칭찬이 제 삶을 얼마나 변화시켜 주셨는지 모르실 거예요. 자존감 약한 저에게 ‘나도 잘 하는 것이 있구나’ 희망을 주신 선생님의 차별없는 사랑에 힘든 시절 잘 견딜 수 있었습니다. 건강하세요. 가까운 날 찾아 뵙겠습니다. 근거없는 비방 기사들도 넘쳐 나지만 코로나 백신도 꼭 맞으시고요.”
참 좋으신 주님께서 당신 승천 대축일에 앞서 스승의 날에 보내 주신 참 좋은 선물이 승천 대축일의 기쁨을 한껏 더하고 있습니다. 팔불출이란 말을 들을 각오한 자랑들입니다. 승천昇天과 더불어 소천召天이란 말과 귀천歸天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모두 하늘의 본향집으로 돌아간다는 죽음을 뜻하는 참 아름다운 말마디입니다. 늘 들어도 좋고 아름다운 천상병 시인의 ‘귀천歸天’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귀천의, 승천의 죽음을 맞이하고 싶음은 누구나의 간절한 소망일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죽어서 승천이 아니라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루하루 날마다 승천의 여정에, 하늘길 여정旅程에, 하늘길 등정登程에 오르고 있는 우리들 입니다. 죽음은 승천의 여정의 끝으로 하늘문 통과와 더불어 끝날 것입니다. 어떻게 아름답고 행복한 성공적인 승천의 순례 여정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희망입니다.
희망에 저절로 따라오는 기쁨입니다. 주님 승천의 기쁨은 희망의 기쁨, 영적 승리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희망은 세상적 희망이 아니라 현실 ‘너머’ 영원하신 분이시자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희망입니다.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이신 주님을 향해 주님과 함께 희망의 여정, 승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제2독서 에페소서에 밝히는 분,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모든 권세와 권능과 주권위에, 그리고 현세만이 아니라 내세에서도 불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이런 그리스도께 영원한 희망의 닻을 내린 우리들이야말로 천하무적天下無敵입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를 유혹할 수 없고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너머’를 말마디를 꼭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의 시선을 언제나 보이는 것 너머 영원하신 주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제 어렸을 때 좋아했던 60년대 ‘박재란’이 부른 ‘산너머 남촌에는’ 가사를 소개합니다. 가사 내용도 곡도 너무 좋아 제가 요즘 산책중 자주 부르는 노래입니다. 산너머 남촌이 상징하는 바 바로 우리 주님 계신 곳입니다.
-1.“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해마다 봄바람이 남으로 오네
아---
꽃피는 사월이면 진달래 향기, 밀익는 오월이면 보리 내음새
어느 것 한가진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 때 나는 좋대나”
2. “산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저하늘 저빛깔이 그리 고울까
아---
금잔디 넓은벌에 호랑나비떼, 보리밭 실개천에 종달새 노래
어느 것 한가지들 실어 안오리, 남촌서 남풍불제 나는 좋대나.”-
바로 이 거룩한 주님 승천 대축일 미사전례를 통해 그대로 실현되는 영적 현실을 상징합니다. 보이는 너머 저 위로부터 오시는 주님 성령의 남풍이 우리를 참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지혜, 깨달음의 순수, 깨달음의 기쁨, 깨달음의 자유, 끝이 없습니다. 승천의 순례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환히 밝히면서 빛의 자녀로, 하느님의 자녀로, 주님을 닮아 참 나로 살게 하는 깨달음의 여정입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 전반부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바오로 사도가 간절히 청하는 깨달음의 선물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의 깨달음의 은총을 청하는 참 아름답고 깊은 내용들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깨달음의 선물들이 얼마나 좋고 아름답고 풍요합니까! 바로 승천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시는 은총의 선물, 깨달음의 선물들입니다.
셋째, 복음선포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사명이자 명령입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내 몸담고 있는 오늘 지금 여기가 세상의 중심이자 복음 선포의 장입니다. 기후재난을 겪고 있는 작금의 절박한 현실이기에 지구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에 대한 생태적 회개가 포함된 복음 선포의 과제입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내 존재 자체가, 내 삶자체가 살아 있는 복음이 될 때, 걸어다니는 복음 성서가 될 때 저절로 이뤄지는 복음 선포입니다.
교황님은 “와서 보시오”(요한1,46)란 주제의 55차 홍보 주일 담화를 통해 사람들을 있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만나 소통하기를 당부 하시면서 발로 뛰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바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살아있는 복음서로 살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어제 읽은 기사입니다.
“백척간두! 이 사자성어만큼 인류의 운명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단어가 또 있을까! 기후변화 연구자들에 의하면,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이전 수준 대비 1.5도로 억제하지 못한다면 사피엔스 문명은 더 이상 보장되지 않는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적어도 2050년까지 전 세계 탄소 배출량을 제로(탄소중립)로 만들어야 한다. 불가능에 가까운 도전이다.”(장대익 교수).
지구안에 있는 모든 피조물 형제들을 포함한 복음 선포는 교회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보다 위대하고 거룩한 사명은 없습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오늘 지금 여기서 앞당겨 실현되기 시작한 하늘 나라 천국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맛보며 살지 못하면 죽어서도 못삽니다.
밖에 멀리 있는 하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의 자리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입니다. 이런 깨달음이 우리를 역동적 승천의 순례여정으로 이끌어 줍니다. 승천하시는 주님을 넋놓고 멍청히 바라보는 제자들을 향한 두 천사의 말씀은 그대로 ‘영적 갈릴래아 사람들’인 우리를 향합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이미 오셔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복음의 제자들의 현실은 다음 복음 묘사 그대로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참 좋으신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는 교회’의 지체들인 우리 모두가, 승천의 순례 여정을 성공리에 마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