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아름다움 -균형, 조화, 상호보완의 일치-2021.5.21.부활 제7주간 토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y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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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5.22.부활 제7주간 토요일                                               사도28,16-20.30-31 요한21,20-25

 

 

 

공동체의 아름다움

-균형, 조화, 상호보완의 일치-

 

 

 

모두가 소중하고(precious), 가치있고(worthy), 환영받아져야 하고(welcome), 아름답다(beautiful).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교황님이 보낸 메시지의 내용중 한 구절입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요 선물이며 말 그대로 ‘신의 한 수’와 같은 공동체의 형제들입니다. 그 누구도 절대적인 사람은 없고 모두가 한계와 약점을 지닌 상대적인 사람들입니다. 

 

절대가 있다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파스카의 예수님뿐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비와 부요와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서로 다름에 대해 겸손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 다르기에 공동체의 균형과 조화와 풍요의 아름다움이요 상호보완에 다양성의 일치입니다.

 

내일은 대망의 성령 강림 대축일이고 엊그제 아랫집 수녀님으로부터 성령칠은 카드를 받고, 주고 받은 덕담입니다.

“감사합니다. 수녀님, 성령칠은 선물 가득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신부님께서도 성령 충만한 여정 되세요.”

 

성령칠은 역시 성령 공동체의 풍요와 신비,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흡사 하나이자 일곱인 무지개의 빨,주,노,초, 파,남,보의 일곱가지 색깔을 연상케 합니다. 세상에 성령칠은 은총을 모두 받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곱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성령께서 믿는 이들의 성화聖化를 위해 베풀어 주시는 일곱가지 선물에 대해 살펴봅니다.

 

1.지혜(sapientia);구원에 필요한 일에 끌리어 맛들이게 하는 은혜

2.통달(intellectus);주님의 신성한 진리를 깨닫게 하는 은혜

3.의견(consilium);우리가 행해야 할 선과 악을 분별케 하는 은혜

4.지식(scientia);영생을 얻기 위해서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혜

5.굳셈(fortitudo);구원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를 용감히 이겨내고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은혜

6.효경(pietas);하느님을 참 아버지로 알아 사랑하게 하는 은혜

7.두려움(timor;경외敬畏);전능하신 하느님 앞에 경외감을 가지며 하느님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는 은혜

 

참 아름답고 풍요롭고 신비로운 성령칠은입니다. 얼마전 읽은 ‘각자는 타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고 모두는 성령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One listening to the others; and all listening to the Holy Spirit)는 말마디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성령聖靈의 은총이야 말로 인간 무지無知와 허무虛無에 대한 근본처방根本處方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교회공동체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성령칠은입니다. 어느 것 하나만을 절대라 할 수 없는 일곱이자 하나인 성령칠은입니다. 이런 자각이 깊어질수록 성령께 대해, 공동체에 대해 더욱 감사한 마음, 겸손한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어제 금요강론중 나눈 마지막 고백같은 내용도 깊은 깨우침을 줍니다. 공동체 일치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똑같은 견해를 나누지 않고도 친구로 머물렀다. 우리는 논쟁이 된 주제에 대해서는 ‘논쟁이 된 문제들에 대해서는 자유(libertas), 모든 것 안에서 애덕(chartas)’이라는 원칙을 준수했다. 하여 우리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정이 손상되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획일성의 폭력적, 강제적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의 균형과 조화의 일치가 아름답습니다. 이래야 모두가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이렇게 달라도 다양성의 일치를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애덕입니다. 애덕이 없다면 공동체는 분열로 공중분해될 것입니다. 애덕 부재의 분열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어떤 공동체도 좌파적 성향과 우파적 성향,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 관상적 성향과 활동적 성향, 이상적 성향과 현실적 성향의 사람들이 공존하게 마련입니다. 서로 간 애덕 안에서 존중과 배려, 인내와 경청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새가 좌우로 날 듯이 공동체 역시 좌우로 납니다. 좌우 둘인 손, 발, 눈, 귀가 하나이자 둘로 공존해야 함을 알려주는 결정적 표지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대하면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베드로가 활동적 성향이라면 애제자 요한은 관상적입니다. 사랑의 관상입니다. 애제자의 예수님 사랑은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어찌보면 애제자 요한은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관상가들을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후 발현하신후 고기잡이 하던 제자들중 가장 먼저 ‘주님이시다!’ 하며 주님을 알아 본 이가 애제자요한이었습니다. 빈무덤 소식을 듣고 앞서 수제자 베드로에 앞서 달렸던 이가, 빈무덤을 보는 순간 예수님 부활을 직감한 이가 애제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아래 끝까지 서있던 이가 애제자 요한이었고 예수님은 이런 애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성모님을 맡겼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성모님을 사랑하는 우리 하나하나는 익명의 관상가이자 애제자인 요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애제자가 누군지 분명치 않지만 교회의 가르침대로 요한이라 명명합니다. 그러니 베드로의 몫과 역할, 애제자의 몫과 역할이 다를 수 뿐이 없습니다. 서로 비교하여 경쟁하거나 질투할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의 처지에 서로 감사해야 하고 겸손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기민하게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여 베드로의 중심을 잡아 주는 모습이 참 적절합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어제에 이어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라라’ 말씀하십니다. 애제자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은 접고 나를 따르는 일에 전념하라는 충고입니다. 불필요한 간섭에 대해 흔히 따끔한 일침이 되는 말마디, ‘니나 잘해!’ ‘니가 뭔데?’란 두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관상의 애제자 요한과 활동의 수제자 베드로가 상호보완의 좋은 조화를 이루듯 보수의 베드로와 진보의 바오로가 또 좋은 상호보완 관계에 있음을 봅니다. 바오로의 역할과 베드로의 역할이 엄연히 다르고 천지차이입니다. 오늘로서 사도행전은 끝납니다. 진보의 바오로의 열정적인 선교활동의 결과 마침내 갈릴래아 변방에서 시작된 교회가 이제 세계의 중심인 로마로 이동합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생략됐지만 바오로가 로마에 도착하는 과정이 얼마나 파란만장했는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사슬로 바오로를 묶어 놓을 수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묶어 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에 도착한 바오로는 셋집에서 만 이 년 동안 지내며, 자기를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맞아들이며,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칩니다. 

 

마침내 바오로가 세계의 중심지 로마에 불붙인 선교의 불길은 전유럽으로 번집니다. 이 일은 전통의 사도 베드로나, 관상의 사도 애제자 요한이 할 수 없는 바오로 사도 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부단히 균형과 조화, 상호보완의 아름답고 신비롭고 풍요로운 다양성의 일치 공동체로 성장시켜 줍니다.

 

"주님의 사랑 우리 위에 굳건하고,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여라."(시편117.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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