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1.화요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100-165) 기념일
토빗2,9ㄴ-14 마르12,13-17
삶(사랑)의 신비, 삶(사랑)의 기적
-삶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의 신비다-
“주님의 산으로 오를 이 누구인고? 거룩한 그곳에 서 있을이 누구인고?”
그 손은 깨끗하고 마음 정한 이, 헛군데에 정신을 아니 쓰는 이로다.
이웃에게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이로다.
주님이 그에게 복을 내리 시리라. 구원의 하느님께 갚음을 받으리라.”(시편24,3-5).
주님의 산, 불암산 기슭 성전에서 아침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오늘 아침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시편성구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하루하루가 신비입니다. 하루하루가 사랑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신비로운 사랑의 섭리 안에 펼쳐지는 선물같은 하루입니다. 도대체 너무나 다른 우리들이 이렇게 한 수도가정을 이뤄 살고 있다는 사실도 하느님 신비의 섭리 은총이 아니곤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요 행복감입니다. 절로 생각나는 행복기도 두 연입니다. 아무리 인용해도 새롭고 좋은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좋아하며 때로는 읽다가 울컥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희의 모두이옵니다.
저희의 사랑, 저희의 생명, 저희의 힘, 저희의 기쁨, 저희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의 선물이옵니다.”-
선물대신 기적을, 신비를, 은총을, 섭리를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정말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라면 실망, 절망, 원망의 삼망은 있을 수 없고 감사-감동-감탄의 삼감의 삶에, 진실-성실-절실의 삼실의 삶, 유쾌-상쾌-통쾌의 삼쾌의 삶만이 있을 뿐입니다.
끝은 시작입니다. 어제로 기분 좋았던 5월의 성모성월이 끝나자 오늘은 장미꽃 사랑처럼 화사한 6월 예수성심성월의 시작입니다. 성모성월을 아름답게 장식한 어제 5월의 마지막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이 저에겐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특히 어제 하루 많이 묵상한 말마디가 ‘영적도반’이었습니다. 저에게는 주님 안에서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이들이 영적도반처럼 생각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영원한 영적도반처럼 생각되고 오늘부터 시작되는 제1독서 토빗도 영적도반처럼 생각됩니다.
‘저에게는 매일이 영적도반의 방문 축일입니다’, 바로 어제 강론 제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따라 면담이나 고백성사차 오전 오후 뜻밖에 방문했던 분들이 아주 많았고 저는 주저없이 ‘오늘은 형제님(자매님)의 수도원 방문 축일입니다’ 라고 기분 좋은 덕담德談을 드렸습니다. 어느 자매와 나눈 문답도 생각납니다.
-“판단과 분별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판단은 미움에서 나온 편벽된 생각입니다. 전체가 아닌 부정적 일부분만 볼 때 판단입니다.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분별입니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분별의 지혜, 분별의 사랑을 지닌 이들은 결코 차별하지 않고 사람이든 삶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사람 눈에 기적奇蹟이지 하느님 눈에는 일상日常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천상적 지혜가 바로 그러합니다. 인간적 지혜로는 세상적 지혜의 극치인 이들의 함정을 빠져 나갈 수 없습니다. 세금을 내라해도 걸리고 내지 말라 해도 걸립니다. 양자택일이 불가능한 참 대답하기가 막막합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사면초기의 위기의 순간, 기적같은 분별의 지혜가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참으로 상쾌하고 통쾌하고 유쾌한 장면입니다. 참 놀라운 것은 이런 위기에 순간에도 예수님께는 전혀 두려움이나 불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깊고 고요한 내적 평화를 지닌 예수님이셨습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이 데나리온의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황제의 것입니다.”
사실 데나리온의 한쪽에는 황제의 흉상과 ‘티베리우스 황제, 지존한 신의 아들’이란 각명이, 또 다른 쪽에는 황제의 존칭 ‘대제관’이란 각명과 함께 대비 리비아 좌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통쾌한 답변에 이들은 크게 감탄했다 합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적대자들의 상상을 초월한 천상적 기적같은 지혜이지만 하느님의 눈에는, 예수님의 눈에는 일상일뿐입니다. 결코 정교분리 원칙을 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초상이 있는 데나리온은 황제의 것이지만 하느님의 모상이 새겨져 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두가 하느님의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전체적인 시야를 보는 지혜를 지니고 각자 세금을 낼 것인지 내지 말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저 같으면 조용히 세금을 낼 것입니다. 문득 조선시대 청나라와의 병자호란때 실리를 추구한 주화파(최명길)와 명분을 추구한 척화파(김상헌)의 대결이 생각납니다. 결국 생존이 절박한 절체절명의 순간 인조 임금은 주화파의 손을 들어 줬고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우연이나 요행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 자비의 섭리의 손길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본회퍼의 옥중서간에서 읽은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구절도 생각납니다. 오늘 토빗의 사건이 그러합니다. 전개되는 토빗의 고난이 욥과 흡사합니다.
죽은 이를 묻어 준 선행 후 닥친 토빗의 불행이 정말 이해 불가합니다. 뜻밖에 뜨거운 참새똥이 떨어져 잠자던 토빗의 눈을 멀게 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이 또한 하느님 섭리 손길 안에서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사실 당장은 몰랐지만 삶의 뒤안길에서 회고해 볼 때 굽이굽이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임을 깨닫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당신의 그 자선들로 얻은 게 뭐죠? 당신의 그 선행들로 얻은 게 뭐죠? 그것으로 당신이 무엇을 얻었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토빗을 향한 아내의 말이 오늘 우리게 화두처럼 주어집니다. 참으로 믿음의 시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이 그대로 토빗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의로운 마음 굳게 주님을 신뢰하네.”(시편12,7ㄴ). 믿음의 어둔 밤을 묵묵부답黙黙不答, 믿음으로 통과해 나가는 토빗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성월 첫날은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2세기 뛰어난 평신도 신학자이자 호교론자였던 유스티노 역시 ‘신의 한 수’ 같은 교회에 주신 하느님의 선물같은 성인이였습니다. 참으로 평생 가열加熱차게 치열熾熱하게 하느님을 찾았던 구도자의 모범 성 유스티노입니다.
마침내 철학의 한계를 느낌과 동시에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한 유스티노는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됩니다. 이후 로마에서 오래 머물며 설교와 저술로 그리스도교를 수호하다가 165년 다른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합니다.
새삼 순교는 사랑의 성체와의 결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 순교요 순교적 삶입니다. 이런 순교자의 삶을 통해 환히 빛나는 예수성심의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성심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