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정주 -늘 새로운 시작-2021.6.21.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1568-1591)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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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21.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1568-1591) 기념일

창세12,1-9 마태7,1-5

 

 

 

떠남과 정주

-늘 새로운 시작-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 몸 둘 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 하오리다.”(시편73,26.28)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주님을 찬미하라, 좋으신 하느님을. 그 이름 노래하라, 꽃다우신 이름을.”(시편135,3)

 

새벽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주옥같은 시편성구들입니다. 문득 예전 성염 교수님이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써드린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많은 시들중 이 시를 써달라 했습니다.

 

-“새벽

새들 찬미 노래에

잠깨는 숲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

 

이런 요지의 시로 기억됩니다. 아마 후반부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라는 구절이 마음에 끌렸던 듯 합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하루 10시간 번역 일을 하신다는 말씀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예로부터 하느님을 사랑했던 수도승들은 새벽을 사랑했습니다. 일찍 일어나 준비하다 부활하신 주님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했습니다.

 

얼마전 ‘시는 나의 닻이다’란 김수영 시인에 관한 책을 읽었고 지금은 ‘체 게바라 평전“을 틈틈이 읽고 있습니다. ’아, 이분들은 혁명가이자 신비가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인의 기질이 농후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나에게도 새삼 이런 혁명가적 기질과 신비가적 기질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23세 짧은 나이에 페스트 환자를 돌보다 감염되어 병사했으니 실은 순교한 예수회 출신의 성 알로시오 곤자가 역시 내적 혁명가이자 신비가의 기질을 지닌 분이심이 분명합니다. 결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주님을 찾았던, 아주 젊은 나이에 성덕에 도달했던 분입니다. 바로 하느님만을 찾는 수도승들의 기질이기도 합니다. 성인의 영성을 묘사한 본기도입니다.

 

"천상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알로시이오가 놀라운 정결과 참회의 정신으로 살아가게 하셨으니, 그의 공덕과 전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그 정결과 참회의 정신을 충실히 본받게 하소서."

 

단 주님 안에서 내적 혁명가요 신비가입니다. 사실 옛 예언자들은 대부분 주님의 혁명가이자 신비가이자 시인이었습니다. 주님 대신 사랑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사랑의 혁명가이자 신비가이자 시인입니다. 반드시 앞에 ‘사랑’이 붙습니다. 예전 써놨던 ‘혁명’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이런 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

폭우 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 백사장白沙場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 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무려 20년전 시지만 영원한 현재의 시처럼 공감이 갑니다. 이래야 늘 새로운 시작입니다. 참으로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내적혁명의 삶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늘 떠남과 정주로 이어지는 우리 내적 순례 여정의 삶입니다. 

 

이런 깨달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2014년 안식년을 맞이한 800km 2000리 산티아고 순례였고 평소 지론을 확인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영원한 현재’의 추억이 된 보석같은 순례 체험입니다. 참으로 막막했지만 뜻밖의 선물처럼 주어진 함께했던 두분의 도반 덕분에 가능했고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지금도 여전하여 매달 강론을 제본하면 꼭 발송해 드리곤 합니다.

 

산티아고 순례중 가장 기뻤던, 가슴 설레었던 시간은 새벽 시간이었습니다. 날마다 새벽 2시쯤 일어나 한적한 곳을 찾아 아이패드에 강론을 써서 인터넷에 사진과 함께 올렸습니다. 이어 5시쯤 도반과 함께 매일미사를 봉헌했고 아침 간단한 식사후 배낭을 꾸린후 새벽 순례길에 올랐습니다. 떠날 때의 기쁨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말 그대로 순례 여정은 주님 향한 끊임없는 떠남의 여정임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배낭에는 미사도구가 늘 준비되어 있었고 흡사 자신이 움직이는 수도원 교회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즉시 우선 미사봉헌할 정주의 자리를 찾았습니다. 어디나 주님 계신 제대이기에 늘 행복했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창세기,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나는 모습에서 떠오른 생각들입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내릴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아브라함은 물론 내적 순례 여정중에 있는 모든 참된 구도자들이자 수행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바로 떠남의 여정에 한결같이 충실한 자들이 오늘의 아브라함입니다. 끊임없이 떠남의 여정의 충실할 때 안주가 아닌 참 정주의 흐르는 맑은 강같은 삶입니다. 산티아고 순례는 끝난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날마다 평생 계속됨을 깨닫습니다.

 

아담과 바벨탑의 실패에 좌절할 하느님이 아니십니다. 다시 심기일전 아브라함을 통해 새롭게 구원활동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감동스럽습니다. 하느님께는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이런 하느님께 불림을 받아 매일 새롭게 시작할 때 그대로 아브라함처럼 누구나 하느님의 복이 될 것입니다. ‘너는 복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불림 받아 떠남의 여정에 오른 우리 인간의 본질은 복福임을 깨닫습니다. 탐욕덩어리가 아닌 복덩어리 존재들, 바로 우리의 정의가 됩니다.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일흔 다섯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요, 졸업이 없는 영원한 주님의 학인이요, 늙음이 없는 영원한 청춘의 구도자 아브라함임을 깨닫습니다. 더 감동스런 놀라움은 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즉시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음으로 정주의 자리를 분명히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늘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함께 한 아브라함임을 봅니다. 제가 산티아고 순례중 매일 미사를 통해 제단을 쌓았던 일과 흡사합니다. 내적순례여정중에 있는 수도공동체 형제들 역시 날마다 매일미사를 봉헌함으로 제단을 쌓으며 정주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이렇듯 떠남의 여정과 정주의 삶을 늘 새롭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내적 여정을 단적으로 요약한 삶이 ‘산과 강’이라는 자작시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 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 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바로 이런 깨달음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이 됩니다. 하느님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는 무지로 인해 심판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떠남의 여정에 정주의 삶에 충실하면서 영원하신 도반인 주님과 깊은 우정관계에 있는 구도자들이라면 절대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진정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이들이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자기를 모르는 무지로 인한 무자비한 심판입니다. 진정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랑의 수행자들이라면 절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가 상대방을 안다해도 극히 일부분일 뿐입니다.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전체를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대부분 착각이요 오해로 인한 심판입니다. 모두가 그만이 피치 못할 사유가 있는 법이요, 오직 이 모두를 아시는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일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 자 얼마나 될른지요. 참으로 겸손한 사랑을 지닌 지혜로운 이들을 결코 심판하지 않습니다. 내적으로 심판해도 즉시 뉘우칩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 남 심판하는 것이요 제일 힘든 일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섣불리 판단했다 ‘너나 잘해!’, ‘니가 뭔데?’ 반발에 직면하기도 할 것입니다.

 

산티아고 순례 여정은 30일 전후로 끝났지만 인생 순례 여정은, 떠남의 여정은, 비움의 여정은 아버지의 집에 도착하는 죽음의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평생 순례 여정중 날마다 이정표 역할을 해주는 참 고마운 매일 미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마음을 날로 비워 아무도 심판하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는 겸손과 지혜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사랑의 혁명가, 사랑의 신비가, 사랑의 시인으로 살게 해주십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사람! 주님이 당신 소유로 뽑으신 사람! 주님은 하늘에서 굽어보시며, 모든 사람을 살펴보신다.”(시편33,12-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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