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22.연중 제12주간 화요일 창세13,2.5-18 마태7,6.12-14
하느님 중심의 삶
-분별력, 황금률, 좁은문-
"주여,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따르며, 당신을 경외하고 당신 얼굴을 찾으리이다."(다니3,41)
하느님 중심의 삶자체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축복의 삶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 모범입니다.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제1독서 창세기 서두가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구절은 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요약합니다.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세13,18)
제단을 쌓을 자리 꼭 성전만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자리입니다. 저로 말하면 날마다 밤 이른 시간 일어나 집무실에서 강론을 쓰며 제단을 쌓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1.기도하는 시간, 2.공부하는 시간, 3.회개하는 시간, 4.위로와 치유의 시간이 강론 쓰는 시간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강론을 읽으며 묵상한다면 이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을 날로 깊게 해 줄 것입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유언이자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다.” 게시판에 붙여 놓고 늘 되뇌어 보곤 합니다. 사실 이런 강론준비보다 더 좋은 미사준비도 없습니다.
우리 수도원 수사님들의 항구하고도 치열한 분투의 삶 역시 말그대로 하느님의 중심의 삶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아니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 모두가 그러합니다. 재적과가 끝난 배밭 배열매들 크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습니다. 탁구공 크기만합니다. 곧 봉지싸는 일이 펼쳐질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ㄴ), 특히 농장 수사님들이 좋아하는, 참으로 농사일에 종사하는 분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구절입니다.
어제 때에 맞춰 요란한 굉음轟音을 내며 농약차를 운전하며 농약을 살포하는 수사님들이 흡사 전투에 출동한 모습같아 감동이었습니다. 요즘 착한 형제자매들이 배판매에 결정적 도움을 주니 용기백배 사기충천한 농부수사님들입니다. 농사는 80%가 하느님이, 20%가 사람이 하는 것이라니 참된 농부라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겸손과 인내의 참된 농부가 됩니다. 80% 하느님 은총과 20% 사람 노력의 결과가 배열매들이니 기도의 열매, 은총의 열매인 배즙이라는 결론입니다. 요즘 강론의 도움 요청에 호응하여 이런 배열매로 만든 100% 순도의 배즙을 판매해 주는 형제자매님들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자체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하는 모든 일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선사되는 온갖 필요한 축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그 축복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첫째, 분별력分別力의 은총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 누가 개들이며 돼지들인가 물을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때 적절한 말과 행위를 하라는 분별의 지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건 차별差別이 아니라 분별分別의 지혜입니다. 말그대로 분별력의 지혜요 사랑입니다. 내 좋을 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사랑으로 잘 분별하여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또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어지는 분별력의 은총입니다.
둘째, 황금률黃金律의 실천입니다.
예수님 약 10세때 죽은 유대인 랍비 힐렐에 관한 일화가 재미있습니다. 한 사람이 조롱하듯 힐렐에게 그가 한발로 서있는 동안 ‘전 토라(the whole Torah)’를 자기에게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을 때 힐렐의 가르침입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마라. 그것이 토라 전부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힐렐의 소극적 부정적 황금률보다는 예수님의 적극적 긍정적 황금률이 더 깊고 풍부합니다. 힐렐대로 한다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예수님 대로 라면 이웃을 위해 할 일은 무궁무진 끝이 없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런 적극적 긍정적 황금률이야말로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의 절정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빛나는 열매들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율이요 모든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바로 이런 분별력과 황금률의 빛나는 모범이 제1독서 창세기의 주인공인 무욕無慾의 아브라함이요, 조카 롯에 대한 그의 관대寬大한 처신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다.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에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그대로 롯에 처분을 일임하므로 황금률을 실천하므로 공존의 평화와 화목을 추구하는 너그럽고 지혜로운 아브라함입니다.
셋째, 좁은문의 자발적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월한 만고불변의 진리요 참 생명과 구원의 길이 이 말씀에 달렸습니다.
“너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굳이 좁은문 찾아나설 것은 없습니다. 바로 누구나의 지금 여기 제 삶의 자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을 자리이자 동시에 통과해나가야 할 좁은문입니다. 본능적 욕망대로의 삶이라면 바로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자 넓은문입니다. 그러니 좁은문이나 넓은문은 내 선택의 문제이니 이 또한 분별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대로 정의와 사랑을, 산상수훈 말씀을 치열하게 실행하는 일이 바로 구원의 좁은문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바로 좁은문 통과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 교사의 충고(?) 또한 잊지 못합니다.
“이 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예, 저에게는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삶인 걸요!”
솔직한 심정의 발로입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내 사랑 전부이지만, 그때에는 아이들이 내 사랑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44년전 제자들이 찾는가 봅니다. 사실 밖에서 볼 때 좁은문이지 안에 들어와 보면 넓은문입니다. 내적으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좁은문을 통과하면서 점점 넓은문이 됩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늘 고통이 따르고 휴식이 없는 삶이었지만 날로 내적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로 넓어진 넓은문이었습니다.
참 이런 기막힌 진리가 오늘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벌어집니다. 롯은 눈의 욕망따라 넓은문을 택한 결과가 바로 멸망에 이르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좁은문은 결국 축복에 이르는 생명의 문, 넓은문이 되고 말았으니 참 하느님의 구원섭리가 오묘합니다. 보십시오. 롯이 아브라함에게 갈라져 나간 다음 하느님은 친히 좁은문을 택한 너그럽고 욕심없는 아브라함에게 한량없는 축복(창세13,14-17)을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하루하루가 첩첩산중疊疊山中 넘어야 할 산이요, 첩첩문중疊疊門中 통과해나가야 할 좁은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입니다.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바로 여기 참 기쁨과 행복도 있습니다. 성규 머리말 마지막 분도 성인의 말씀이 좁은문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머리48-50)
비단 정주의 분도 수도자들뿐 아니라 좁은문의 현실을 살아가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주옥같은 가르침입니다. 이와 맥을 같이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시 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게는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늘 분투의 노력과 다짐을 새롭게 하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깊이하시며 잘 분별하고 좁은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인간이 무엇이기, 주여 마음 쓰시옵고, 그 종락 무엇이기 생각해 주시나이까?
인간이란 하나의 숨결같은 것, 지나가는 그림자 그의 날들이외다."(시편143,3-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