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6.23.연중 제12주간 수요일 창세15,1-12.17-18 마태7,15-20
하느님 중심(中心)의 삶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
“내 영혼아 주님 찬양하라, 당신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죽음에서 네 생명 구하여 내시고, 은총과 자비로 관을 씌워 주시는 분,
한평생을 복으로 채워 주시니, 네 청춘 독수리마냥 새로워지도다.”(시편103,2.4-5).
아침시편 성무일도중 마음에 와닿은 주옥같은 성구들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박정자 배우를 알것입니다. 참 놀라운 분입니다. 1942년 생으로 현재 우리 나이로 80세이고 1962년 연극 배우로 첫 데뷔하였으며 강렬하고 열정적이며 지적인 배우라는 평가도 있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자격도 얻은 분입니다. 올해로 무대 인생 50년이니 말그대로 은퇴가 없이 영원한 현역으로 금경축을 맞이한 것입니다. 다음 인터뷰 내용도 가톨릭 수도사제인 저에게도 전적으로 공감이 가는 내용에 참 매력적인 분이었습니다.
-1.그런데 박정자는 언제나 무대에서 죽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큰 복을 신(神)이 나한테 주실까? 물론 무대 위에서 이러다 쓰러지겠다, 싶었던 적은 몇 번 있어요. 그때 든 생각은 아, 그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고 전사(戰死)해야 비로소 ‘주님의 전사(戰士)’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제 간절한 소망입니다.
-2.그가 네 살 때 세상을 뜬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이름 가운데 ‘바를 정(正)’으로 지었을까. ‘고요할 정(靜)’이나 ‘빼어날 정’도 있건만.
“여자 이름에 ‘바를 정(正)’자를 넣는 경우는 거의 없거든요. 그러나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평생 그 ‘바를 정(正)’자가 나를 붙들어 주었다고 생각해요.”
-3.박정자는 29년전,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누가 나의 인터뷰를 쓴다면 ‘그녀는 평범하다’는 문장으로 시작했으면 좋겠어’”라고.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그렇게 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미인이 되려고 노력한 것도 없고. 그러나 나는 무대에서 평범을 거부해요. 관객들은 평범한 사람을 보러 극장까지 갈 이유가 없죠. 그러나 평상시에 무대 밖에선 하염없이 평범한 사람, 내 말이 틀렸나요.”
참으로 하느님만을 찾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서 수도승의 기본 자질인 열정과 순수, 그리고 겸손의 덕목까지 지닌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삼 이름이 얼마나 상징성이 뛰어나고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면에서 가톨릭 신자들에게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했던 성인들의 세례명을 지닐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삶이 좋아야 글도 말도 행위도 좋습니다. 좋은, 진실한, 아름다운 진선미(眞善美)의 삶에서 진선미의 글과 말도 행위도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여자에 진씨라면 진선미 이름을 갖고 싶습니다. 역시 믿음이 좋고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신망애(信望愛)의 삶이라면 그런 삶은 그대로 글과 말과 행위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시(詩)도 똑같습니다. 빛과 생명, 희망의 사람은 시도 그렇습니다. 글이나 말, 행위는 그대로 그 사람의 표현입니다. 평생 빛과 생명, 희망이 넘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에 빠져 살다 보니 세상 시(詩)들에 대한 맛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세상의 어느 시가 다음 성서의 시편과 같겠습니까?
“인생은 풀과 같고, 들꽃같은 그 영화, 스치는 바람결에도 남아나지 못하고,
다시는 그 자취도 찾아볼 길 없도다.
주님 자비만은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을 섬기는 자에게 계시도다.
그 후손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정의는 계시도다.”(시편103,15-17)
진선미(眞善美)의 삶은 그대로 신망애(信望愛)의 삶에 직결됨을 봅니다. 참으로 믿을(信)때 참된(眞) 진실한 삶이요, 하느님을 생생히 바랄 때(望) 참 좋은(善) 삶이요, 경천애인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愛)할 때 바로 아름다운(美) 삶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여자에 신씨라면 진선미(眞善美)에 이어 이번엔 신망애(信望愛) 이름을 지니고 싶습니다. 사실 희망이 좋아 이메일 주소는 “spes@1004” 발음하면 ‘희망(spes) 천사(1004)’입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이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는 복음의 소제목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을, 진실치 못한 거짓 예언자들을 경계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주님은 우리 모두 진실할 것을 강력히 권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악인들보다도 위선자들을 극도로 혐오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 들이겠느냐? 이와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 볼 수 있다.”
새삼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모두를 살펴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과연 나는 좋은 나무같은 사람일까 혹은 나쁜 나무같은 사람일까.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처럼 사람도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이 되는 것이 확정적이고 고정적일까?’ 여러 생각도 듭니다. 권태응 시인의 감자꽃 동시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야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과연 자주 감자, 하얀 감자처럼 사람도 운명적으로 고정 확정되어 있을까요?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든지 ‘변질이 아닌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란 부정적 인간 정의에 대한 말도 있지만 저는 단연코 거부하고 싶습니다. 고정불변의 선인도 악인도 성인도 죄인도 없습니다. 이 모두는 우리 인간의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잠정적 분별로서 그칠 것이지 판단까지 이르진 말아야 합니다. 나무와 달리 사람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상에 나쁜 사람이, 악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에서는 진선미의 사람, 신망애의 사람이 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답은 단 하나 하느님 중심의 삶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는 분투의 노력에 하느님께서 감동하심으로 주시는 신망애와 진선미의 은총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주님을 닮아갈 때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으로 변모됩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이들 삶의 여정을 예닮의 여정, 하닮의 여정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여정에 항구하라고 우리를 격려하는 성인의 세례명입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의 아브람이 그 좋은 모범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잡으시고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십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의 방패다. 너는 매우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이어 전개되는 하느님과 아브람간의 대화 내용을 보면 둘 사이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깨닫게 됩니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시고 모세에게처럼 자신을 환히 계시해줍니다.
“나는 주님이다. 이 땅을 너에게 주어 차지하게 하려고, 너를 칼데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낸 이다.”
이어 친히 아브람과 계약을 맺게되니 평생 주님과 우정의 여정에 오르게 된 복된 아브람입니다.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것 보다 큰 축복은 없고 우리 모두 이런 축복받은 존재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러니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 진선미의 삶에 항구하는 분투의 노력입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세15,5)
축복의 원천이신 하늘이신 하느님께서 아브람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하늘의 별들처럼 주변에 널려 있는 축복의 선물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은 신망애의 사람, 진선미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늘 닿도록 당신 사랑 크옵시기에, 구름에까지 당신 진리가 미치시기에.
하늘들 위에 위에 하느님 나타나소서, 온 땅에 빛나소서, 당신의 영광.”(시편108,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