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으로 불림받은 우리들 -섭리攝理;은총, 광야廣野;겸손, 사명使命;빛-2021.6.24.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n 24,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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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6.24.목요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이사49,1-6 사도13,22-26 루카1,57-66.80

 

 

 

성인聖人으로 불림받은 우리들

-섭리攝理;은총, 광야廣野;겸손, 사명使命;빛-

 

 

 

“주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하신 이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

주님, 하신 일들이 얼마나 크옵시며, 생각하심 얼마나 깊으시니이까?”(시편92, 5-6)

 

아침 성무일도시 주옥같은 시편성구입니다.우연偶然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 은총恩寵입니다. 우연이라 생각할 때는 의미도 없고 감사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섭리 은총이라 믿을 때는 의미도 감사도 감동도 책임감도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이라는 믿음의 유무가 얼마나 극단적 인생관을 지니게 하는지요!

 

어제는 참 오랜만에 어머님 묘소에 성묘하러 다녀왔습니다. 이젠 형님들이 다 세상을 떠나 제가 맏이가 됐습니다. 우여곡절 사연이 있었지만 잘 다녀왔으니 분명 은총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는 참으로 수도원이 큰 위기중에 있었고, 이 위기가 수습되면서 어머님이 그해 2005년 6월14일에 돌아가시니 지금 생각해도 하느님 섭리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그 후로도 어려움이 계속됐지만 잘 수습 정리되어 자치수도원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니 하느님 은총의 섭리에 감사할 뿐입니다.

 

얼마전 2년만에 수도원을 찾은 어느 산부인과 의사와의 대화 내용도 생각납니다. “한번 사출되는 정자수가 5000만개요 그중 힘있고 건강한 것들이 7개쯤 질에 도착하고 이중 하나가 수정되어 사람이 되니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탄생은 하느님 섭리의 은총이 아니곤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라는 요지의 설명이었습니다.

 

지난 화요일 교황님의 제1회 ‘세계 조부모와 노인들의 날’을 맞이하여, ‘하느님은 당신들의 외로움을 위로하고자 천사들을 보내신다’라는 메시지 또한 섭리 은총중에 있는 사람들임을 깨닫게 합니다. 또 어제 일반 알현 시간의 ‘복음화는 우리가 예기치 않은 길들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라는 말씀에서는 하느님 섭리의 은총에 응답할 수 있도록 귀도 눈도 늘 깨어 열려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탄생 대축일을 지내는 유일한 성인이기에 저절로 기쁨이 샘솟는 느낌입니다. 참 신기한 것이 영원한 현재성을 띄고 있는 성인들이라 흡사 예전 분들이 아닌 현재 살아있는 듯이 생각됩니다. 말 그대로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성인들입니다. 성인 축일들은 기념, 기억하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성인이 되라고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인 축일의 궁극 목표이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제자가 스승을 찾아 성경을 10번이나 통독했다고 자랑했을 때 스승은 ‘성경은 너를 몇 번이나 읽었느냐?’물었고 제자는 아무 대답도 못했다 합니다.-

 

성서나 평전評傳을 읽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읽는 것이 성독聖讀이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 또한 성인으로 불림 받고 있지 않은가?’ 두루두루 생각하며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제 독서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인으로 불림 받은 유일무이한 고유의 의미있는 존재인 우리 모두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께 결정적 역할을 한 성 요한 세례자를 통해 우리의 역할을 묻게 됩니다. 성 요한 세례자에게 예수님은 삶의 존재이유이자 모두였듯이 믿는 우리들 또한 그러합니다. 성인으로 불림받은 우리 모두에게 깨달음의 은총처럼 주어진 화두같은 말마디 셋이 있으니 섭리, 광야, 사명입니다.

 

첫째, 하느님의 섭리 은총입니다.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 섭리 은총에 따라 성인으로 불림받은 우리들입니다. 바로 예수님이나 옛 예언자들, 성 요한을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하느님 섭리 은총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바로 이사야서 다음 고백 말씀에서 하느님께서 점지한 인생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어,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주님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셨다. 나는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 주셨다.”

 

예수님이나 요한 세레자의 고백일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 모두의 고백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의 성인들로 불림 받은 ‘신의 한 수’ 같은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형제자매들에 대해 저절로 샘솟는 존중과 배려, 경외와 연민의 사랑입니다.

 

둘째, 광야 여정의 열매가 겸손입니다.

광야가 상징하는 바 참 심오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보금자리 안식처임과 동시에 사탄과의 끊임없는 영적전쟁의 전장戰場이기도 합니다. 광야 인생 여정중의 오늘 지금 여기 우리 자리는 주님의 전장이자 주님의 장막, 주님의 산, 주님의 오두막, 주님의 은둔처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수도원 성전에 붙어있는 나무들에 숨겨져 있는 제 집무실을 주님의 장막으로 부르며 다음 시편 성구를 자주 되뇌어 보곤 합니다.

 

“주여 당신 장막에 묵을 이 누구오리까, 거룩한 당신 산에 살을 이 누구오리까, 허물없이 살아가며 의를 하는 이, 마음 속에 진리를 품은 사람이외다.”(시편15,1-2)

"당신이 내리신 빛과 진리가 나를 이끌게 하시고, 당신의 거룩한 산, 그 장막으로 나를 인도하소서."(시편43,3)

 

분명 성 요한 세례자도 광야여정중 이 시편을 묵상하며 자신을 추스렸을 것입니다. 광야의 고독중에 단련되고 정화되어 순금같은 강도强度와 순도純度를 지닌 겸손하고 정직하고 온전한 요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복음의 후반부가 이런 요한의 면모를 잘 보여줍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복된 우리 각자 삶의 자리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주님의 장막입니다. 여기서 단련되고 정화되어 굳세어지는 정신입니다. 정신과 영혼의 허약함에서 기인하는 온갖 심신의 질병들입니다. 이런 강인한 정신이 바로 겸손임을 다음 요한 세례자의 고백이 입증합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바로 광야여정중의 빛나는 깨달음이자 성취가 겸손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알아갈수록 참 나를 아는 것이 바로 겸손과 지혜입니다.

 

셋째, 사명입니다.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입니다. 이름이 상징하는 바 그 고유의 사명입니다. 고유의 존재는 고유의 사명을 실천하므로 삶의 실현이자 완성입니다. 복음의 다음 일화가 요한의 이름에 담긴 사명이 얼마나 크고 중대한지 깨닫게 합니다.

 

“안됩니다. 요한이라 불러야 합니다.”

라는 엘리사벳의 외침에 사람들은 손짓으로 즈카르야에게 묻습니다. 즈카르야는 잠시의 불신으로 벙어리와 동시에 귀머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묵묵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쓰자 모두 놀라고,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이, 아이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화두같은 물음은 우리가 항상 자신에게 물으며 우리의 사명을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심을 사람들이 깨달았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손길이 늘 우리의 사명 수행중에 함께 계심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성 요한 세례자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사명을 수행하는 중에 주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우리들 하나하나가 이스라엘입니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의 빛으로 세운다.’ 성 요한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지닌 사명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의 빛으로서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제2독서 사도행전의 우리 모두를 향한 바오로 말씀이 참 고맙고 반갑습니다.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오늘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오늘만 있을 뿐입니다. 참으로 은혜롭게도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구원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파견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구원의 말씀이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되어 주님의 영광을 환히 드러내며 주님의 빛으로 사는 날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의인은 빨마처럼 무성하고, 레바논의 체드루스처럼 잘라나리니,

주님 집안에 심어진 그들은, 하느님의 뜰에서 꽃피리이다.”(시편92,13-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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