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5.월요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1821-1846)
역대하24,18-22 로마5,1-5 마태10,17-22
순교영성의 시대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
오늘 우리는 한국순교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봉헌합니다. 성인을 생각할 때마다 늘 함께 살아 계신 듯 신선한 감동을 느낍니다. 25세 꽃다운 짧은 인생을 사셨지만 보통 사람의 몇배를 참으로 충만한 삶을 사신 순교 성인입니다. 성인보다 거의 3배를 살아가고 있는 저를 더욱 분발케 하는 순교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입니다.
새삼 삶은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았는가, 즉 삶의 양이 아닌 삶의 질에 대해 묻게 됩니다. 성일 축일 때 마다 불렀던 아름답고 비장悲壯한 성가 287장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최민순 작사, 이문근 작곡)’도 생각납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여.
동지사 오가던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앞에 닫혀있던 조국의 문
겨레의 잠깨우려 애타신 그의넋이, 이역의 별빛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4절까지중 2절까지만 인용했지만 전부가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올해는 한국천주교회에 참 각별한 날입니다. 바로 성인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로 한국천주교회는 2020년11월29일-2021년11월27일까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지내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친필 메시지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사랑하는 한국의 국민에게 진심어린 인사를 보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고,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지켜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020년10월23일
프란치스코”-
마침 7월2일자 한겨레 22쪽 ‘교황이라는 제왕적 칭호’라는 강우일 칼럼중 프란치스코 교황님에 관한 감동적인 내용 일부를 인용합니다.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은 서울 도착 후 한국주교회의 본부를 방문하고 주교단 전체와 만났다. 방문 기념 서명을 부탁하려고 가로세로 40cn 정도의 두꺼운 서명판을 준비하여 드렸다. 교종께 서명판을 돌려받았는데 서명이 안보였다. 제대로 의사 전달이 안 되었나 싶어 서명을 해주시라고 다시 부탁드렸다.
교종은 잘 보라고 했다. 서명판을 다시 살펴보니 아래쪽에 깨알같이 “프란치스코”라고 쓰여 있었다. 놀라서 다른 주교들에게 그 서명판을 보이자 모두 “와!-”하고 감동과 경탄의 환호가 터졌다.
그래서 나는 프란치스코 교종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그런 분에게 여전히 교황이라는 제왕적 칭호를 습관적으로 붙이는 것은 역사를 올바로 성찰하지 않고 프란치스코 그분의 인품과 삶의 행적을 무시하고 욕되게 하는 것이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순교자는 물론 모든 성인들은 우리의 영원한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 우리 삶의 좌표가 됩니다.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을 줍니다. 늘 강조하지만 기념, 기억할뿐 아니라 우리 또한 성인이 되어 순교영성을 살라고 있는 순교성인 축일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순교영성의 시대입니다. 어떻게 순교영성을 살아야 합니까?
첫째, 믿음의 삶입니다.
양상과 정도의 차이일뿐 계속되는 ‘주님의 전사’로서의 영적전쟁의 삶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바로 믿음의 전사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믿음의 전사들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바도 믿음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습니다. 어떤 박해의 힘든 상황중에도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우리에게 일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하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십니다.
이어 주님은 참으로 어떤 역경중에도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뎌내는, 버텨내는 인내의 믿음입니다. 끝까지 참는 자가 이깁니다. 궁극의 승리는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에게 돌아갑니다.
둘째 희망의 삶입니다.
희망이 있어 인내의 믿음입니다. 희망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세상의 보이는 희망이 아닙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비전이자 희망의 별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입니다.
이런 희망이 샘솟는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희망이야말로 영혼의 명약입니다. 잘 먹고 운동 잘 해서 건강이 아니라 희망이 생생해야 온전한 건강입니다. 온갖 시련 중에도 희망의 빛이 우리를 인도합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말씀도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셋째 사랑의 삶입니다.
사랑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끊임없이 부어집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우리 사랑의 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수맥水脈’에서 샘솟는 우리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런 하느님 주신 사랑이 있어 한결같은 지칠줄 모르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역대기 하권의 요아스 임금과 유대의 대신들을 이런 사랑을 잃어 하느님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이들은 예언자들의 증언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급기야 즈카르야 예언자까지 살해합니다. 즈카르야가 두려움 없이 이들을 질책할 수 있었던 것도, 의연히 순교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사랑의 힘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새삼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 말이 생각납니다. 사랑의 순교요 사랑의 성체입니다. 그러니 평생을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로, 즉 믿음의 전사, 희망의 전사, 사랑의 전사로 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신망애 향주삼덕의 순교영성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끝으로 순교영성을 요약한 제 좌우명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