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17.연중 제15주간 토요일 탈출12,37-42 마태12,14-21
늘 새로운 하루
-참으로 절실한 관상적 삶-
“주여,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보내 주소서,
영광의 옥좌에서 그를 내려 주옵소서.
지혜가 나의 곁에 나와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지혜9,10).
한 밤중에도 열대야로 덥습니다. 잠깨어 휴게실에 불이 환히 켜져 있어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더위 탓에 잠을 설친 탓인 듯 한 수도형제가 쉬고 있었습니다. 기후변화 위기가 실감있게 마음에 와 닿고 있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연합회 소식지 77호의 첫째 제목이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World in Turmoil”(대혼란 속의 세상)
이란 제하에 ‘남아공화국 폭동으로 70명이상 사망, 쿠바 시위로 오후 1시부터 통행금지, 베네즈웰라 수도 시가전 25명 이상 살해됨’이란 기사 내용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온 세계가 기후변화로 ‘몸살’- 서유럽, 물폭탄에 100명 이상 숨져, ‘16일 국내 코로나19 확진 확진자 1563명 발생, 일단 1600명 아래로 내려옴’, 국내외가 공통적으로 겪는 대혼란입니다.
“과학은 이것(홍수)를 기후변화의 명확한 징후라고 말한다. 정말로 정말로 행동해야 할 긴급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결연한 싸움에 참가해야 우리는 기상 상황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폭우 피해에 대한 두 정치지도자의 절박한 고백입니다.
강건너 불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덜먹고 덜쓰는 무공해의 관상적 삶이 절실합니다. 늘 새롭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부화뇌동, 경거망동, 일희일비의 삶이 아니라 제 삶의 자리에서 말 그대로 파스카 신비의 삶을, 늘 조용히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도자들에게 아마 가장 행복한 시간은 하루의 영적전투가 끝나고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 때일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무덤에서 편히 쉬신 아드님과 같이 저희도 편히 쉬게 되었으니, 내일도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금요일 끝기도후 마침기도).
참 아름답고 깊은 위로를 주는 기도입니다.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벽에 다시 일어나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 또한 수도자에겐 큰 기쁨입니다. 정말 믿는 이에겐 하루하루 날마다의 밤이 유일무이한 ‘파스카의 밤’입니다. 매일매일이 부활성야의 파스카의 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탈출기(12,37-42) 밤동안 내내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인도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행군하는 장면은 그대로 부활성야 파스카의 밤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밤새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셨듯이, 똑같은 주님께서 부활성야뿐 아니라 매일 밤, 전세대 신자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새롭게 이끌어 내십니다. 그러니 날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내고 새롭게 맞이하는 새벽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지금도 선명한 언젠가 인용했던 ‘새벽’이란 시입니다.
“새벽 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물러나는 어둠
잠깨는 숲
새로 시작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2001.5.29.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시입니다. 며칠전 읽은 글 역시 새벽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김종철 선생은 2013년 7월17일, 한 특강에서 존 버저를 인용했다.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알고 있다. 어느 날 이 시스템이 붕괴될 것이라는 것을.” 선생은 이 글귀를 보고 무릎을 탁쳤다고 한다. “실제로 그래요. 사람이 잠에서 막 깨어나는 순간이 직관력이 가장 정확한 시간입니다. 그때 머릿속에 솟구치는 생각이 진리예요. 대낮에 이래저래 머리 굴려 생각한 것은 틀리기 쉬워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새삼 영적 삶에 새벽의 영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새벽 동틀 때까지 외딴곳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새벽 관상기도 시간이 하루 삶을 받쳐주는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새벽뿐이 아니라 관상적 삶은 하루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한 수도형제와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한주간 평일 강론을 미리 써놓는다는 어느 사제에 대한 제 의견이었습니다.
“날마다 새벽마다 새롭게 짓는 ‘따뜻한 밥’같은 강론이 아니라, ‘식은 밥’같은 강론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식은 밥, 식은 국을 덥힌다 해도 새로 짓는 밥이나 국같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잘 준비해 뒀다가 새벽마다 따뜻한 밥짓듯이 쓰는 강론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상가 예수님 역시 새벽을 사랑하셨고 새벽 아버지와 만나는 관상기도로 하루를 여셨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관상적 면모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시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바로 지혜롭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입니다. 인용된 이사야서 내용은 그대로 예수님의 관상적 면모요, 우리의 관상적 삶을 위한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다음 이사야서가 말하는 주님의 종인 예수님은 물론 세례받아 주님의 자녀가, 종이 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펴리라.”
어떻게 하면 주님이 선택한 종답게,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에 드는 종답게 올바름을 펴면서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다음 예수님처럼 관상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관상가로서의 면모는 그의 한곁같은 자비행으로 입증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이런 예수님이시기에 싸우기 보다는 물러 나시고 당신을 홍보하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어질고 자애롭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참으로 어질고 자비로운 예수님이십니다. 치유이적, 구마이적을 통해 잘 드러나는 예수님의 어지시고 자비로운 관상가의 면모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화답송 후렴처럼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자애로운 하느님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희망의 빛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평화입니다.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참 희망은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희망의 빛이 우리를 밝힙니다. 절망의 어둠,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희망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리 또한 관상가 예수님처럼 1.온유하고 겸손한, 2.어질고 자애로운 관상가로, 또 3.희망의 빛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 관상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