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우리의 내면인 마음밭이 문제다 -답은 은총과 수행-2021.7.23.연중 제16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ul 2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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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7.23.연중 제16주간 금요일                                                             탈출20,1-17 마태13,18-23

 

 

 

사람이, 우리의 내면인 마음밭이 문제다

-답은 은총과 수행-

 

 

 

사람은 가능성입니다. 완전한 선인도 완전한 악인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선설과 성악설은 여전히 논쟁중입니다. 사실 성서에는 두 관점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다 믿고 싶습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을 봐도 선악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분투의 수행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이 율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느님께는 모두가 가능하다 했습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은총과 노력에 대한 올바른 해법일 것입니다.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수행하라는 것이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도 있고 우보천리牛步千里란 말도 있듯이 항구히, 한결같이 수행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이지요. 이와 연관되어 중국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 일화도 생가납니다.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풀이’입니다. 앞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것으로 초점은 씨와 씨뿌리는 사람에 있는 반면, 오늘 씨뿌리는 사람 비유 풀이는 예수님 친히 발설하신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실생활에 적용한 우의적 해설로, 초점은 말씀의 씨앗이 아니라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는 ‘토양’인 마음밭에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문제가 아니라 땅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탓할 것은 말씀이 아니라 우리라는 것입니다. 바로 길바닥같은, 돌밭 같은, 가시덤불속같은 땅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길바닥같은 마음밭의 사람이,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그 사람안에 뿌리가 없어서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장 걸려 넘어지는 돌밭 같은 마음밭의 사람이, 또 말씀을 들어도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덤불같은 마음밭의 사람이 바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반면 가장 이상적인 사람은 좋은땅같은 마음밭을 지닌 사람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아 백배, 혹은 예순배나 삼십배 열매를 맺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 독자들을 향해 화두처럼 주어지는 비유의 풀이입니다. 우리 독자들의 내면을 점검해보라는 회개의 촉구일 수 있습니다. 타고난 나쁜땅의 마음밭은 없다는 것입니다. 고정불변의 마음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요소의 땅이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공존하는 우리의 내적현실입니다. 

 

나태함으로 무의욕, 무관심으로 방치하면 나쁜 땅 되는 것은 순간입니다. 악마는 진공을 사랑한다 했습니다. 마음밭을 그냥 놔두면 악마의 놀이터가 됩니다.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라는 성규 말씀도 여기 기인합니다. 아무리 타고난 품종 좋은 신고 배나무도 전지하지 않고, 거름 주지 않고, 약주지 않으면 나무는 영양실조로 병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배나무가 되어 버립니다. 바로 여기서 부단히 가꾸고 돌보는 행위인 전지와 거름주기, 약주기는 그대로 근면한 분투의 수행을, 책임감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진짜 농부는 진짜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나무의 이치나 밭의 이치도 똑같습니다. 아주 오랜전 방치하여 잡초 우거진 정글같은 밭을 보며 ‘태평농법’이라 말하며 웃던 어느 수도형제의 말도 생각납니다. 아무리 좋은 땅도 방치하면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밭이 되는 것은 순간이요 우리 마음밭의 이치도 이와 똑같습니다. 잔디밭 역시 방치하면 이런저런 잡풀이 자라나 잡초밭이 되는 것도 순간입니다. 그리하여 농사는 풀과의 전쟁이란 말도 있습니다.

 

결론하여 고정불변의 좋은 땅이 없듯이 고정불변의 좋은 마음 밭도 없다는 결론입니다. 2000년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낙선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인터뷰시 한 유명한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농부가 밭을 탓할 수 있나요. 제가 못나서 그렇죠.”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희망이,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간절히 항구히 주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수행의 노력을 다할 때 하느님은 은총으로 개입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것이 신망애 향주삼덕입니다. 

 

항구하고 한결같은 분투의 수행과 더불어 주님의 은총이 길바닥같은, 돌밭같은, 가시덤불같은 나쁜 땅의 마음밭을 서서히 점차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서서히 정화되고 성화되는 마음밭입니다. 바로 여기서 뚜렷이 부각되는 제1독서 탈출기의 십계명의 수행입니다. 평화로운 공존공생의 인간관계에 기본적이자 본질적 사랑의 수행이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분류에 따라 유다교와 정교회, 개신교의 십계명이 같고, 가톨릭과 루터교의 십계명이 같습니다. 그러니 분류에 따라 두종류의 십계명이 있는 것입니다. 가톨릭과 루터교의 십계명은 5세기부터 사용되었으며 아우구스티노의 분류에 따라 사용된 것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1.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하지 마라.

8.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유다교와 정교회, 개신교는 두 번째에 ‘우상을 섬기지 마라’가 추가되고, 가톨릭은 ‘안식일’은 ‘주일’이라 쓰고 있으며, 유다교와 정교회, 개신교는 아홉 번째, 열 번째 계명을 ‘남의 아내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열 번째 하나로 합칩니다. 

 

십계명을 포함한 모든 수행중 가장 중요한 기본적이자 본질적 수행이 말씀과 기도가 하나된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수행일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이를 입증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

 

각자 렉시오 디비나의 시스템인 ‘들음listening-묵상meditation-기도prayer-관상contemplation-실천action’에 최선을 다한 열매 풍성한 삶이겠습니다. 렉시오디비나의 성독 수행은 비단 성서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전 삶으로 파급 확장되어 전 삶이 렉시오 디비나의 관상적 삶이 되며 이런 수행의 절정은 우리가 매일 바치는 시편 성무일도와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일 것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전례수행 은총으로 우리 모두 끊임없이 좋은 땅의 마음밭으로 변화시켜 열매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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