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7.30.연중 제17주간 금요일
레위23,1.4-11.15-16.27.34ㄴ-37 마태13,54-58
전례와 삶
-무지에 대한 답은 전례 은총뿐이다-
우리 가톨릭 교회의 자랑은 전례입니다. 전례중의 전례가 미사전례입니다. 교회의 영성은 전례 영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제 교회공동체의 특징에 대해 밝힌 바와 같이 전례 영성에 전례 공동체입니다. 아마 기존의 종교중 가장 전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종교가 가톨릭 교회일 것입니다. 전례를 통해 그대로 살아있는 전통이 계승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의 힘은 그대로 전례의 힘이 됩니다.
참 좋은 전례는 단순하고 깊고 아름답습니다. 전례의 아름다움은 교회의 아름다움을,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반영합니다. 참으로 교회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전례를 사랑합니다. 그리하여 전례학을 공부한 분들 중에서 주교들이 많이 배출되는 것 같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이 대체적으로 깊고 고요하고 순수한 것도 전례은총이 아닌가 싶습니다. 언젠가 불암산을 보며 써놓은 짧은 시도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참으로 신자들이 주님을 닮아 영적으로 크고 깊고 고요하게 만드는 전례은총입니다. 사람과 일반 동물과의 차이를 결정짓는 결정적 요소도 전례입니다. 사람만이 전례를 거행합니다. 참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전례이며 전례를 통해 참 사람이 되어갑니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도 전례 축제 은총입니다.
그러니 전례와 삶은 하나입니다. 전례와 삶은 함께 갑니다. 감히 ‘전례없는 삶은 공허하고 삶이 없는 전례는 맹목이다’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전례를 통해 삶의 꼴도 잡혀 갑니다. ‘삶의 전례화’요 ‘전례의 삶화’입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미사 전례은총이 고해인생을 축제인생으로 바꿉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미사전례를 목말라 하는지요! 좀 더 자세히 전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나눕니다.
“전례는 온전한 그리스도의 행위이다, 이 세상에서 표징들이 암시하는 전례를 거행하는 사람들은 이미 천상전례에 참석하고 있다. 그곳의 전례는 충만한 친교와 축제의 거행이다.”(가톨릭 교리서1136)
“어머니인 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으로 완전히 참여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와 같은 참여는 바로 전례의 본질이 요구하는 것이며, 또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1베드2,9) 그리스도인은 세례의 힘으로 그 참여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전례헌장14항)
“말씀전례는 성사거행의 필수부분이다. 신자들의 신앙을 키우기 위해서는 말씀의 책, 말씀에 대한 존경(행렬, 향, 촛불), 말씀을 선포하는 장소(독서대),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성경봉독, 말씀선포의 연장인 사제의 강론, 회중의 응답(환호송, 화답송, 연도, 신앙고백) 등 하느님 말씀의 표징들이 부각되어야 한다.”(가톨릭 교회서 1154항)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념하는 기도중에 두드러지는 단어 하나는 바로 ”오늘!“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 성령의 초대를 그대로 반향하고 있다.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이 ”오늘“에 들어오도록 초대하시며, 이는 바로 역사 전체를 관통하고 이끌어 가시는 예수님의 파스카의 ‘시간’이다.”(가톨릭 교리서 1165항).
교회의 전례에 대한 주옥같은 가르침을 일부 공부하는 마음으로 나눴습니다. 왜 이렇게 전례로 강론을 시작했을까요? 바로 오늘부터 시작된 제1독서 레위기가 이스라엘의 전례 축일들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축일에 해당하는 히브리 말은 본디 ‘만남’을 뜻하며, 정해진 때에 정해진 장소에서 축제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의 전례 축일들이 정말 많습니다. 축일들의 종교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안식일, 파스카와 무교절, 햇곡식을 바치는 축일, 주간절, 칠월 초하루, 속죄일, 초막절’등입니다. 얼마나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만남을 시도한 모세요 이스라엘 백성이었는지 절절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반복되는 세 말마디가 의미심장합니다. 오로지 갈림없는 마음으로 하느님께만 집중하여 온 정성을 다해 축일 전례를 거행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모임을 열고, 생업으로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된다.”
참으로 우리의 전례 참여 자세를 성찰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떠나선 살 수 없는 인간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떠나 살기에 무수한 폐인에 괴물들이요 무수한 정신질환자들입니다. 모세를 통한 주님의 마지막 결론 말씀은 거룩한 모임인 미사전례에 충실히 참여하라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소집해야 하는 주님의 축일들로서, 이때 너희는 그날그날에 맞는 번제물과 곡식 제물과 희생제물과 제주를 주님에게 화제물로 바쳐야 한다.”
과연 우리는 미사전례때 주님에게 무슨 제물을 봉헌하는 지 묻게 됩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구체적 만남 시간이 바로 미사 전례시간이요, 주님의 현존안에서 영원한 오늘을 살게 하는 미사 전례은총입니다. 인간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도 미사 전례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복음에 대한 답이 독서의 전례 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의 축일들’에 대한 소개이고 복음은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무시, 배척당하는 사실을 전합니다. 바로 편견과 선입견, 질투심의 무지로 눈이 가린 불신의 고향 사람들이요, 바로 무지한 우리 인간의 근본적이자 보편적 모습입니다.
“저 사람은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끝없는 질문을 제기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마음을 닫아 버립니다. 참으로 회개를 통해 믿음과 겸손으로 마음이 활짝 열린 사람들이었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온 지혜와 기적임을 담박 깨달았을 것입니다. 정말 편견과 선입견의 무지에 눈먼 사람들입니다. 전례 축일들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체험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한 오늘 강론 제목이 “전례와 삶-무지에 대한 답은 전례 은총뿐이다-”입니다.
“에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깊은 좌절감을 엿볼수 있게 합니다. 이와 더불어 가까이 있는 형제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데 극히 인색한, 편견과 선입견, 질투의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개방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믿음의 빛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아예 마음을 닫아 버림으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합니다. 아마 거의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개방이 전제되지 않는 한 주님의 일방적 기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전례은총으로 우리의 무지와 허무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시고 참 좋은 믿음을 선사하시며 우리 모두 당신 생명과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