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 -악마들을 퇴치 합시다-2021.8.31.연중 제22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Aug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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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8.31.연중 제22주간 화요일                                                           1테살5,1-6.9-11 루카4,31-37

        

 

 

권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

-악마들을 퇴치 합시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화답송 시편이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악마는 존재한다”,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책명도 생각납니다. 일부 내용을 소개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교황이 21세기에 악마에 대해 말하다니 옛날 사람이군요’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강조합니다. 악마는 존재합니다. 21세기에도 악마는 존재합니다. 악마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유혹합니다. 악마는 간교합니다. 악마와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악마 앞에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모든 악마의 유혹은 ‘그래, 뭐 괜찮아’라고 말할 때 찾아 옵니다. 악마가 다가올 때 이렇게 말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나는 너와 말하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만 듣는다’고 하십시오.”

 

정말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지혜로운 처방입니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더러운 영들인 악마가 활개치는 세상 같습니다. 악마의 일은 분열시키는 일이요 주님이 하시는 일은 일치의 통합입니다. 어느 언론인의 현실 진단입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9년 발간한 ‘사회통합 실태 진단 및 대응 방안 연구’ 보고서를 보면,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사회통합 정도는 10점 만점에 4.18점에서 2017년에 잠깐 4.50점으로 올라갔으나 2018년에 다시 4.17점으로 다시 떨어진 뒤 계속 그 수준을 맴돌고 있다.

 

한국사회는 지금 온갖 갈등의 화염이 들끓고 있는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념갈등, 노사갈등, 빈부갈등 등 고전적인 갈등에다 정규직-비정규적인 갈등, 세대 갈등, 젠더갈등, 세대 안의 불평등 갈등등 갈등의 종류도 훨씬 늘어나고 심각해졌다. 갈등은 우리 사회의 통합을 저해하는 원인이자 그 결과로 작용해 점점 더 사회를 깊은 나락으로 빠트리고 있다.”

 

죄악이 만연된, 악마가 활개치고 있는 세상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나 이제나 변함없는 정도나 양상의 차이일뿐 바로 인간사회의 부정적 현실입니다. 그러나 조금도 비관할 것은 없습니다. 심기일전心機一轉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로 통합의 길, 일치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삶의 목표를, 삶의 방향을, 삶의 중심을, 삶의 의미를 잃었을 때 어김없이 그 자리에는 악마들이 자리잡고 분열의 갈등을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사회통합지수 10점 만점에 그 반도 못되는 4.17점을 맴돌고 있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통합지수는, 내 내적통합지수는 몇이나 될까요? 예수님이라면 10점 만점에 10점, 성인들이라면 8점이상이요, 오늘 복음의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0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엊그제 29일 불교 조계종의 대표적인 선사禪師이자 명예원로의원인 고우古愚 큰 스님이 경북 문경 회양산 봉암사에서 입적하였습니다. 

 

큰 스님하니 얼마전 영화 대사중 스치듯 지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센 사람이 되지 말고 큰 사람이 되라.” 산도 높은 산이 아니라 큰 산이, 깊은 산이 좋은 산이라 합니다. 참으로 내적통합을 이룬 성인이 큰 사람, 깊은 사람입니다. 지금도 생생한 불암산 닮기를 소망하며 쓴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

 

바로 고우 큰 스님도 그런 분이었습니다. 고우 스님은 고승들이 남기는 임종계 대신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간다’고 하라.”고 했다 하니 참 멋진 통합을 이룬 수수한 선승임을 깨닫습니다.

 

요즘 뇌과학과 심리학의 화두는 공감이라 합니다. ‘감정의 꽃’인 공감은 영어(empathy)로 ‘너의 마음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네 처지가 되어 보는 것이 공감입니다. 참으로 내적일치의 통합적 인물이 그대로 ‘공감의 사람’입니다. 

 

바로 내적일치의 통합적 인물의 최고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신 예수님입니다. 이런 삶에서 저절로 흘러 나오는 참 권위입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되겠지만 보고 배울 참 권위는 필수입니다. 혼돈과 무질서, 분열과 갈등의 현실은 바로 권위 부재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권위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참 권위는 밖에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안의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옵니다. 이런 참 권위에 대한 응답이 절대적 신뢰와 사랑, 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합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권위 있는 예수님이,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 악마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권위 있는, 빛이신 예수님 앞에 더러운 영은 더 이상 숨을 수 없자 예수님을 고백하며 자신을 폭로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 했습니다. 하와는 악마와 대화하다 유혹에 빠졌습니다. 예수님 역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단호히 대응하여 더러운 영을 쫓아 냅니다. 더러운 영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지체없이 그에게서 나가니 완전 치유의 구원입니다. 그 무슨 악마도 권위와 힘을 지니신, 권위 있는 말씀을 지니신 예수님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악마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유비무환이 지혜입니다. 처방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바로 권위 있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중심, 삶의 의미인 예수님과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건강한 내적통합의 일치의 삶이요 우리 또한 존엄한 품위의 삶에 권위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통해 우리의 주님과 일치된 복된 신원을 환기喚起시키며 깨어 있는 삶을 살도록 촉구합니다. 깨어 있는 삶과 권위 있는 삶은 함께 갑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같은 ‘깨’자 돌림입니다. 깨어 있을 때, 깨끗한 마음이요, 깨달음의 은총도 뒤를 잇습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빛입니다. 깨어 있을 때 치유의 구원입니다. 깨어 있을 때 악마들은 침투하지 못하고 내재해 있던 악마들도 저절로 퇴치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가 우리를 깨어 있게 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닮아 권위 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혼자의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줘야 합니다. 

 

이렇게 더불어 내적일치의 공동체를 이루어 빛의 자녀로, 낮의 자녀로 살아 갈 때 더러운 영들은 저절로 축출될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온갖 더러운 영들을 몰아내시고 우리 모두 권위 있는 삶, 깨어 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 보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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