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콜로1,9-14 루카5,1-11
참나의 겸손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
-“푸른 하늘은
바다
흰구름은
섬
바다 안 가고도
바다 여행
제주도
바다가는 형제들에게
당부하다
“가슴에 바다 가득 담아 오세요.”
소망한다
하늘같은 마음, 바다같은 마음”-2021.8.30.
제주도에 공동실습차 간 수도형제들에게 바다 사진을 받았습니다. 모두를 비워 겸손의 하늘이, 모두를 받아들여 겸손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예수님은 물론 많은 성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닮아 비워 겸손의 하늘이, 받아 들여 겸손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자기를 잊고 노동에 몰두하는 겸손한 모습도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어제 외출 후 열심히 예초 노동을 하는 원장 수사의 모습이 좋아 사진에 담아 나눴고 메시지도 전달했습니다.
-“Good work!
‘십자가의 길’이 아름답네요! 수고많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을 닮은 사람들의 특징은 1.한결같고 2.자유롭고 3.정의롭고 4.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20대부터 눈여겨 온 분들중 그런 분이 무위당 장일순 선생과 권정생 동화작가 그리도 이현주 목사입니다. 제가 볼 때 이 세분들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요 한결같고 자유롭고 정의롭고 겸손한 분들입니다.
천주교 신자이면서도 “도가의 관을 쓰고 유가의 신발을 신고 불가의 옷을 걸친 사상가였고 어느 틀과 논리에 얽매이지 않은 “제일 잘 놀다 간 자유인”이었으며 “그윽한 골짜기에 피어 알려지기 바라지 않았던 난초”같은 분이 바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입니다. 어제 ‘마음건강법을 인생멘토에게 묻다’(한겨레) 라는 제하의 <순천사랑어린학교> ‘마음공부 교사’ 이현주 목사와의 인터뷰 기사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무위당 장일순은 어떤 분이었나?”
“이 지상에서 경험한 마지막 선생이었다. 그 뒤론 스승이 없었고, 예수님만이 남았다. 지리산 천왕봉에 가려면 많은 봉우리를 넘어야 하듯이 마지막 봉우리가 무위당이었다. 내가 뭘해도 부정적인 말을 안했다. 마흔 살 때 다른 여자와 스캔들이 생겨 힘들 때, 반성하며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툭 치더니 ‘일 저질렀구만. 괜찮아. 수습 잘해’라고 했다. ‘교회에서 쫓겨났다’고 하면, ‘왜 쫓겨날 짓을 했느냐’고 물어야 내가 말이 길어질 텐데, ‘자 네가 목사질 제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그분은 관점이 달랐다.”
-“장일순은 가톨릭 신자로서 동학의 해월 최시형을 사숙해 한 살림 운동을 펼쳤는데, 그의 종교관은 어땠나?”
“종교인으로서 출발했지만, 종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분이라고 믿는다. 종교는 하나의 틀일 뿐이다. 애벌레가 고치에 들어간 것은 그 그 속에서 영원히 살려는 게 아니다. 봄이 되면 나비가 되려고 들어간 것이다. 한 종교의 울타리에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다. 크리스천의 목표는 크리스천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장일순이 그랬다.”
-“권정생은 어떤 분이었나?”
“정생이 형이 죽기 얼마 전 나를 가만히 보더니 ‘거, 남 가르치려고 하지 마래이’라고 했다. 무위당도 ‘남이 묻지 않은 말에 답하지 말라’고 했다. 남을 가르치려 드는 나를 바로 잡아 준 유언들이다. 참 고맙게 생각한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 또한 수없이 강론했지만 가르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다만 진리를 나누는 마음으로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참 만남을 갈망합니다. 모두가 만남을 갈구하지만 우리는 잘 만날 줄 모릅니다. 겸손해야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만나야 겸손입니다. 참으로 만남은 은총입니다. 어느 인문학자의 고백에 공감했습니다.
“이 감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이를 ‘만남의 황홀’이라 부른다. 그 황홀은 결코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온다. 그 황홀은 깊은 만남의 순간에 솟구치는 기쁨과 공감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의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주님과의 결정적 운명적 만남이요, 만남의 황홀입니다. 오늘 복음중 예수님과 베드로의 일련의 대화를 다시 나눕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예수님 없는 삶의 허무와 무의미를 상징합니다. 극도로 가난하고 겸손해져 마음이 텅 빈 베드로를 찾아 오신 예수님이요, 예수님의 개입으로 상황은 반전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순종하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았고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베드로의 전광석화같은 반응입니다. 순간 마음의 눈이 열려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그대로 예수님과의 결정적 축복의 황홀한 만남입니다. 예수님 거울에 환히 드러난 죄인으로서의 참나를 발견한 베드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참나를 만납니다. 죄인으로서의 자각이 나를 참으로 겸손하게 합니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만남(창세18,27)이, 욥의 만남(욥42,6)이, 이사야의 만남(이사6,5)이 그랬습니다. 겸손이야 말로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영성의 잣대요, 주님을 만났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지난 주일 삼종기도시 교황님의 강론중 인용한 내용도 참 유익합니다.
“초기 교회의 교부들은, 수도승들은 그들이 ‘무엇이 거룩함의 길입니까?’ 질문 받았을 때 그들은 늘 첫 단계로 ‘자신을 꾸짖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렇게 내 탓이라하며 나를 꾸짖는 것이다. 다른 이를 비난하는 것, 그것은 야만이다. ‘자신을 꾸짖는 것을 배우는 것(learning to blame youself)’, 그것은 지혜다.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누구에게나 좋다.”
참으로 나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주님과의 황홀한 만남의 열매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 참 나를 발견하여 겸손하고 지혜로워진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사명을 부여하였고, 베드로와 일행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에 오르니 만남에 이은 따름입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자 따름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주님을 만나 늘 새로운 따름의 여정에 오르는 우리들입니다.
콜로새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주님을 만난 분입니다. 얼마나 주님과 깊은 만남의 경지에 있는 바오로인지는 오늘의 제1독서 그의 콜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난 체험의 반영입니다. 내용이 깊고 아름다울뿐 아니라 깊은 묵상감이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공부하는 마음으로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1.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2.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능력에서 오는 모든 힘을 받아 강해져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 내기를 빕니다.
3.기쁜 마음으로, 성도들이 빛의 나라에서 받는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을 여러분에게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십시오.”
얼마나 좋고 진실하고 고무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입니까!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체험을 우리 모두와 나누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마지막 고백도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이미 용서 받고 아드님의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앞당겨 사는 우리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주님과 만남의 체험은 우리에게는 선물이자 평생과제입니다. 바오로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될 수 있도록 참으로 주님과 깊은 만남의 은총을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 모두 참 나의 겸손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