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파스카의 꽃’같은 삶-2021.9.3.금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540-604) 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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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3.금요일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540-604) 축일

콜로1,15-20 루카5,33-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파스카의 꽃’같은 삶-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

참 매력적이고 멋진 삶입니다. 참 아름답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늘 새로운 시작의 놀라운 삶입니다. ‘늘 옛스럽고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삶입니다. 웅덩이에 고인 물이 아니라 늘 맑게 흐르는 강물같은 삶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을 닮은 삶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고 성서와 교회의 모든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참으로 온전히 하느님 주신 당신 모상대로의 참 나의 삶을 살았던 분들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대 그레고리오 제64대 교황 학자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성 예로니모, 성 암브로시오, 성 아우구스티노와 함께 서방 4대 교부들중 한분이요, 성 대 레오 교황과 더불어 큰 ‘대大’자가 붙는 교황 대 그레고리오입니다. 과연 큰 분이자 불가사의의 인물로 그분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떻게 한 인물안에 이런 놀라운 능력이 담겨있는 지 참 놀랍기만 합니다. 사후 즉시 대중의 강력한 지지로 즉시 성인으로 시성된 교황입니다.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는 그 각별한 인연으로 오늘 기념일이 아닌 축일로 지냅니다. 이 교황이 지은 ‘베네딕도 전기’가 유명합니다. 교황이 얼마나 베네딕도 성인을 흠모하고 닮으려 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지 않았다면 평생 그토록 사랑했던 수도생활에 몰입했을 교황입니다. 너무나 배울 것이 많은 대 교황이기에 공부하는 마음으로 이분에 대한 일화들을 소개합니다. 

 

‘그레고리오’는 그리스어로 ‘파수하다’ 또는 ‘지키다’라는 뜻으로 중세 작가들은 ‘그는 하느님의 계명 안에서 매우 부지런했다.’라고 평합니다. 교황이 탄생되던 때나 활동시기는 로마는 물론 유럽 전체가 대변동의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특히 로마는 내우외환으로 시달렸습니다. 교황은 로마와 게르만계, 동방과 서방, 고대와 중세의 경계선에 위치한 참으로 하느님이 보내 주신 인물이었습니다. 성인의 모친은 실비아 성녀입니다. 교황이 되기 전에 이미 풍부한 실무로 지식을 쌓아 놨던 분이며 수도생활을 매우 깊이 사랑한 교황은 첼리안 언덕의 자기 저택을 수도원으로 개축하여 안드레아 수도원이라 명명하며 그 안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이 때 너무 엄격한 고행 극기 생활의 후유증으로 평생 건강문제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교황은 공식 문서에 ‘하느님의 종들의 종(servus servorum Dei)’이라는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함으로 교황권을 ‘지배하는 특권’이 아니라 ‘섬기는 특전’으로 이해했으며 후임 교황들 역시 즐겨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중세의 교황제도를 확립한 교황은 그대로 팔방미인이라 칭할 정도로 다방면에 능한 대천재였습니다. 정치, 외교, 선교, 영성, 외치와 내치 어느 쪽에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병약했지만 강한 정신력과 영성으로 이를 원활이 수행했습니다. 영국과 유럽 대륙의 선교도 교황의 업적입니다.

 

교황의 업적중 전례 개혁이 손꼽힙니다. 미사시 빵 나눔 전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도 교황의 창안입니다. 동방교회와는 달리 축일이나 전례력의 변경이 많아져 수많은 기도문이 만들어 집니다. 교황의 전례 분야 업적중 ‘그레고리오 성가’가 유명합니다. 이 바쁜 업무중에도 교황이 집필한 수많은 저술도 정말 불가사의입니다. 욥기 주해, 사목 규범, 대화록, 강론집, 열왕기 상권주해, 4대 복음서 강론집, 아가 강론,  854편의 서간들, 얼마나 부지런한 교황이었는지 이런 교황을 보면 시간없어 못한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을 것입니다.

 

노먼 캔터는 “그는 수수께끼 같은 분으로 유능하고 결단력 있는 행정가이자 능숙하고 지혜로운 외교관이면서 놀라울 정도의 세련됨과 꿈을 지닌 지도자다.”평합니다. 교황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사업에도 온 힘을 쏟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대리자로 삼으시어 힘겨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책임을 맡기셨습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의 재산을 보살피는 관리인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라는 글이 교황 서간에 나옵니다. 

 

빈민들에게의 구호품 배부는 매월 이루어졌습니다. 교황은 식사할 때, 12명의 빈민들을 손님으로 초대해 같이 식사하였으며 그때 사용한 대형식탁은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습니다. 교황은 어느 뒷방에서 가난한 사람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살인자라고 자책하며 수일 동안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레고리오 교황은 604년 선종 수년 전 일기도 얼마나 큰 병고를 겪었는지 충격적입니다.

 

“열한 달 동안 나는 거의 침대를 떠날 수 없게 되었다. 통풍과 고통으로 너무 괴로운 나머지 매일 죽음의 안식을 기다린다. 근 2년 동안 나는 침상 위에 매여 있었다. 틍증이 너무 괴로워서 축일조차 세시간 동안 일어나 미사를 봉헌하기가 버겁다. 나는 매일 죽음의 문턱에 서고, 매일 그 앞에서 내쳐진다. 오랫동안 침상을 떠나지 못했다. 나는 애타게 죽음을 기다린다.”

 

604년 3월 12일은 마침내 64세로 파란만장한 참 치열한 하느님의 종으로 살았던 교황의 선종일입니다. 이날은 언제나 사순시기이기에 교황이 주교로 서품 받은 날인 오늘 9월3일을 축일로 지냅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인 교황의 생애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란 예수님의 삶을 그대로 닮은 1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감있게 마음에 와닿는 성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삶이 바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의 영적 삶입니다. 이래야 꼰대라는 말도 듣지 않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글을 소개합니다.

 

“카페 메뉴판에 라떼의 수난 시대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로 변형되어 ‘라떼’가 비웃음을 당하는 요즈음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이는 꼰대가 된다. ‘꼰대’는 나이와 권위를 앞세워 아랫 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연장자, 기성세대. 어른, 선생님 등을 풍자한 은어다.

 

기성세대는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며 젊은이들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했던 노력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들은 그들의 길을 알아서 갈 것이다. 대신 통찰력, 포용력, 예견력, 측은지심, 공감, 배려 같은 능력을 배양하는 데 기성세대 스스로 먼저 집중하면 어떤가

 

언제든지 젊은이들이 아쉬운 게 있어 손을 내밀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것이 꼰대하는 말 대신 어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같다.”(장명숙;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단식 문제로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대로 꼰대의 전형입니다. 예수님의 처신은 얼마나 신선한 감동의 충격인지요! 이들의 사고방식을 바꿀 것을 충고합니다. 말 그대로 발상의 전환입니다. 늘 새롭게 변하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헌 가죽 부대 같은 내 사고방식을 새 부대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평생 공부입니다. 

 

바로 고루한 내 사고방식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받는 어른이 되려면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누구나 깨어 정신 차리지 않으면 보수화되어 가는 경향과 더불어 꼰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의 말씀이 꼰대가 되어 가는 경향에 대한 예리한 지적입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니 꼰대는 나이 들어 늙어가면서 누구나의 숙명처럼 생각됩니다. 꼰대에서의 유일한 처방이자 탈출은 늘 깨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리 배우고 공부해도 예수님 공부는 끝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야 말로 예수님 공부의 대가임을 오늘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가가 입증합니다. 초대 교회 신자들로부터 지금의 우리에게 이르기 까지 매주 수요일 저녁성무일도시 부르는 끝없는 깊이의 콜로새서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 인간들이요 그 원형이 오늘 콜로새서 찬가의 주인공인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신비, 그리스도의 신비, 사람의 신비, 우주의 신비, 삶의 신비가 함축된 놀라운 깊이의 영성을 표현하는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어느 한 구절 생략 할 수 없는 마르지 않는 샘같은 깊이의 찬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분께서는 만물에 앞서 계시고, 만물은 그분 안에서 존속합니다.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분은 시작이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맞이이십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그분십자가의 피를 통하여 평화를 이룩하시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대략 적어 봤습니다. 세상에 이런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답이자 모두임을, 또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중심이자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주님을 닮아 새롭게 시작할 때 비로소 꼰대로부터 탈출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끝으로 파스카의 꽃이란 자작시로 강론을 끝냅니다.

 

-“우리는

꽃이다

 

죽는 그날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날마다 늘 새롭게 폈다지는 

 

꽃이다

주님 파스카의 꽃이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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