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자녀의 삶 -기도, 배움, 선포-2021.9.7.연중 제23주간 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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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7.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콜로2,6-15 루카6,12-19

 

 

 

하느님 자녀의 삶

-기도, 배움, 선포-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시편145,8-9)

 

화답송 시편이 감미롭습니다. 분노하니 야고보 사도의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또 여간해서는 화를 내지 마십시오.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정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야고1,19-20) 라는 충고도 생각납니다.

 

미사중 주님의 기도 바치기 전 권고 말씀이 할 때마다 늘 새롭고 마음이 상쾌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얼마나 영예로운 호칭이 하느님의 자녀인지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신 우리들은 얼마나 행복한 존재들인지요!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주님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시편16,1-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시편의 하느님 고백은 늘 들어도 감미롭습니다. ‘사람답게 산다’ 막연합니다. 분명치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산다’ 분명합니다. 세례 받았다 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과정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분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침 어제 ‘생명의 끈’같은 줄기에 매달린 계속 커가고 있는 호박을 사진에 담아 여러분과 메시지와 더불어 나눴습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호박의 쾌유의 격려인사 받으시고 힘내시고 행복하세요.”

 

믿는 이들의 삶은 은총의 여정임과 동시에 분투의 노력의 여정입니다. ‘돈오頓悟는 존재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돈오는 점수漸修의 한 계기일 뿐이다. 우리 인생은 점수의 과정일 뿐이다. 허황된 득도에 홀려 도를 이야기하지 마라!’ (동경대전2;320쪽) 어느 석학의 일갈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새롭게 폈다지는 ‘파스카의 꽃’같은 우리 믿는 이들입니다.

 

교황청 교황님의 홈페이지는 생명의 샘과 같아 새벽 일어나면 우선 확인합니다. 문득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맑고 맑은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 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란 귀여운 동요도 생각납니다. 흡사 교황님의 홈페이지를 찾는 제 모습 같기도 합니다.  

 

“마음의 치유는 들음과 더불어 시작된다.”

“어느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하느님은 젊으시다.”

“교회는 선포하고 경배할 다른 이름을 갖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얼굴은 복음이고 그분의 현존은 성체성사다.”

 

새벽 눈에 띈 주옥같은 말마디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 게 아니라 하느님을 찾는 열정의 마음에 있습니다. 슬로바키아의 부다페스트에서 열리는 52차 국제성체대회에 참석차 교황 재임중 34번째 해외 사도직 방문을 갖는 86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하느님을 닮아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영원한 젊음의 소유자이십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하루하루 날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 예수님과 깊은 관계에 있는지 오늘 콜로새서의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 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하십시오. 

 

온전히 충만한 신성이 육신의 형태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몯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아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현주소입니다. 참 좋은 보금자리 안식처인 주님의 집을 놔두고 세상의 헛된 것들의 유혹에 빠져 집을 잃고 뿌리없이 표류 방황하는 영적靈的 미아迷兒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에게 참 중요한 일은 이런 그리스도 예수님과 우정 관계를 깊이하며 그분 안에 날로 깊이 뿌리 내리는 파스카의 삶뿐이겠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첫째, 기도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기도합니다. 삶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기도에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의 치유는 들음과 더불어 시작됩니다. 

 

하느님과 소통의 대화요 하느님과 침묵의 관상중에 머무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전제조건은 침묵과 들음입니다. 침묵과 들음의 기도에서 순종과 겸손도 뒤따릅니다. 열두사도를 부르시기 전 치열히 기도하며 준비하는 예수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흡사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모습같습니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중요한 시기마다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 기도인지요! 비단 이 때뿐이 아니라 예수님은 밤마다 외딴곳에서 아버지와 깊은 관상적 일치의 기도시간을 마련하셨습니다. 나라의 대통령은 물론 지도자 위치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예수님 처럼 기도를 생활화, 일상화했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배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배우는 것입니다. 제자의 어원도 ‘배움(to learn)’에 있습니다. 평생학인이 되어 배우는 자가, 공부하는 자가 예수님의 참제자입니다. 저역시 이른 새벽 날마다 배우는 마음으로, 공부하는 마음으로 강론을 씁니다. 수도자의 기본 자질은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열정이 배움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원동력이 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와 함께 계신,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이신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죽어야 끝나는 배움입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께 늘 깨어 열려 있는 마음으로 온유와 겸손을, 순종과 섬김의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이래야 영원한 청춘의 젊음입니다. ‘기도하라’, ‘공부하라’ 제자직의 필수 조건입니다.

 

셋째, 선포입니다.

‘기도하라’, ‘공부하라’에 이어 세 번째 ‘선포하라’입니다. 안으로는 기도와 공부의 제자가 되고 밖으로는 복음 선포의 사도가 되어 진짜 수행자修行者가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래서 열둘을 뽑아 사도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입니다. 

 

안으로는 관상, 밖으로는 활동,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바로 이것이 올바르고 건강한 믿는 이들 삶의 영적 리듬입니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성령의 도움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결코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류상종의 집단이기주의 게토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활짝 열린 제자공동체이자 사도공동체였습니다. 

 

여기 수도원도 그렇습니다. 세상과 유리 격리된 섬같은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세상의 빛이, 세상의 중심이 되고 있는 존재가 수도공동체요 바로 이것이 수도원의 존재이유입니다. 환대歡待를 통한 복음 선포의 사도직, 바로 정주 수도원이 지향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다음 복음 대목에서 예수님을 중심한 제자들의 사도직 활동이 잘 드러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결국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가르치시고 치유하심을 깨닫습니다. 사실 제가 쓰는 강론도 주님께서 저를 통해 쓰시는 것임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치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인터넷 ‘접속’이 아닌 살아 계신 주님과 ‘접촉’의 만남이 절실한 시절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그 결정적 증거입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이십니다. 손만 뻗치면 어디서나 닿을 수 있는(to touch)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를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시어 당신의 제자로 살게 하시며 말씀과 치유의 사도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저의 하느님, 당신을 높이 기리나이다.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찬미하나이다.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시편145,1-2)

 

참 기쁨은, 참 행복은 하느님 찬미 찬양에 있습니다. 오늘도 찬미의 제자, 찬양의 사도가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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