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파스카 예수님의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2021.9.9.연중 제23주간 목요일 ​​​​​​​

by 프란치스코 posted Sep 0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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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9.9.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콜로3,12-17 루카6,27-38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파스카 예수님의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파스카 예수님의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 사랑하라 주어지는 남은 날들입니다. 나이들어 이런 저런 병으로 약을 복용하는 이들은 은총으로, 사랑의 빚으로 사는 삶임을 뜻합니다.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날들입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소중한 날들인데 약을 먹으면서 죄를 짓거나 헛된 일에 빠져 시간과 정력을 낭비함은 너무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허무도 욕심도 아닌 사랑입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서 사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도 다른 무엇도 아닌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사랑의 빚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인지요. 허무에 대한 답도, 무지에 대한 답도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평생공부해야할 사랑 공부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인생 학교에 재학중인 평생 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공부해도 하느님 사랑에 비해선 영원한 초보자란 깨달음이 더욱 분발 노력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바오로 수사님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식사시 수도형제에게 한 말이 화두처럼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작년 7월12일에 선종하였고 얼마전에는 1주기 기일미사도 봉헌한 수도형제 바오로 수사입니다. 바로 죽음이 우리의 미래라는 엄연한 사실입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길 없는 노화요 죽음입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절로 깨어 하루하루 사랑의 본질적 삶을 살게 합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환상은 사라지고 사랑의 본질 하나만 남기 때문입니다. 

 

며칠전 읽은 녹색평론의 글이 생각납니다. 어느 독자가 타계하기 전의 선각자先覺者의 반열에 드는 생태문명가 김종철 선생과 나눈 대화 내용입니다.

 

-‘한번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성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구약이 신약보다 더 인간적이지 않습니까?”했더니, “구약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신약성서는 ’산상수훈(마태5,1-7,29;루카6,20-6,49)’ 하나만으로 이 세상의 어떤 책보다도 더 가치가 있다”고 하시면서 산상수훈을 풀어주셨다. 한마디로 ‘겸허’와 ‘소박’이었다. 이것은 주제로 늘 등장하는 것이었지만 그날을 마치 설법과 같았고, 좌중에는 한동안 숙연함이 흘렀다.’(녹색평론180호;164쪽)-

 

종파를 초월해 어느 경지에 이른 모든 영성대가들이 격찬하고 감탄했던 부분이 바로 오늘 복음의 산상설교중 ‘원수를 사랑하라’는 핵심부분입니다. 사랑에 관한 강론중 이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능가할 강론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구구절절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생과제의 사랑입니다. 도대체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사람으로 태어난 이들이 참으로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빛의 자녀답게, 참나의 성인답게 보람있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살라고 선물로 주어진 인생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살아 있는 주님의 복음 말씀이 우리의 심금心琴을 울립니다. 하느님 경지에 이른 하느님의 외아드님 예수님 말씀입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을, 사랑을 대변하는 예수님입니다.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런이들이 실로 내적으로 강한 이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항구히 열렬히 사랑할 때 주어지는 이런 사랑의 은총입니다. 지난 밤부터 들렸던 풀벌레 영롱한 사랑의 찬미 노래가 지금 새벽도 계속됩니다. 이처럼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사랑에 항구하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화답송 시편 후렴, ‘숨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실천으로 악순환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아가페 사랑만이 악을 무력화無力化시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런 사랑은 주고 받는 유류상종의 사랑도 아니며 성적이거나 감정적 이기적 사랑이 아닌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존중과 연민의 본질적 사랑, 아가페 사랑입니다. 좋든 싫든 상관없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존중과 배려, 연민의 사랑입니다. 우리 눈에 원수요 박해하는 자이지 그 나름대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내적 사랑의 시야를 주님을 닮아 날로 넓고 깊이해야 함을 배웁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남을 단죄하지 마라. 용서하여라. 주라.”

 

세상에 이런 복음을 예수님이 아니곤 어느 종교 어느 누구에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하면서 분발 노력하게 하는 하느님을 닮아 성인이 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토록 높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랑의 본질을 지닌 인간이기에 누구나 이렇게 될 수 있고, 되어야 하고, 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이래서 항구한 기도와 말씀 실천의 수행으로 한결같이 하느님 닮기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의 전형적 모범이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오늘로서 끝나는 제1독서 콜로새서는 그 절정을 보여주는 바오로 사도의 사랑에 관한 불후의 설교입니다. 복음의 예수님의 산상설교와 콜로새서의 바오로의 설교가 참 좋은 보완관계를 이룹니다. 

 

복음에 대한 답처럼,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길을 바오로의 설교가 보여줍니다. 역시 무엇하나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살아있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심금을 울리는, 100% 순도의 생명의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모두를 대상으로 합니다. 마치 복음의 산상설교에 대한 주석같습니다.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으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 후속의 수행을 강력히 권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파스카의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 지혜를 다하여 서로 가르치고 타이르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와 영가를 불러 드리십시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이 답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확실히 말하면 사랑의 파스카 예수님과의 일치가 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사랑의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 모두의 지칠줄 모르는 아가페 사랑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마지막 말씀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콜로3,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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