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12.연중 제24주일 이사50,5-9ㄴ 야고2,14-18 마르8,27-35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랑, 배움, 따름-
“나는 주님 앞에서 걸으리라. 살아 있는 이들의 땅에서 걸으리라.”(시편116,9)
시편 화답송 후렴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요즘 대통령 후보로 나선 분들의 활약이 눈부십니다. 참으로 기도하는 겸손한 믿음의 후보들을 보고 싶은 데 눈에 띄지 않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은 모두가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원주의 의인, 저명한 사회운동가이자 시대의 스승이었던 이미 타계하신 무위당 장일순 요한 선생의 평전을 읽다가 선생이 어느 술자리에서 고백한 6.25사변 당시 성호경 기도로 살아난 일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국군에게 체포당한 장일순이 아무리 북한군이 아니라고 해도 증명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박박깍은 머리만 보고 인민군이라고 확신한 국군 장교는 부하들에게 총살을 명했다. 전시 때 총살은 여러 명을 한 줄로 세워 놓고 한 사람씩 쏴 죽이는 방식이었다.
장일순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라고 군인이 물었다. 천주교 신자인 장일순은 말없이 눈을 감고 성호를 긋고 죽음을 기다렸다. 갑자기 앞에서 “중지!”라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사형을 집행하던 장교가 천주교 신자였던 것이다. 그는 장일순이 십자가 성호를 긋는 것을 보고는 순간적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이 공산당원일리가 없다고 판단하고 사형을 중지시킨 것이다.’(장일순평전;50쪽)-
선생이 26세에 대성학교 교장으로 있던 학교의 “참되자!”라는 바위판에 새겨진 투박한 교훈비 글씨 사진도 깊이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세상에 십자성호보다 더 좋은, 짧고 온몸으로 할 수 있는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특별한 기도의 기적뿐 아니라 우리가 모를뿐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무수한 기적이 뒤따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세상이 어지럽고 삶이 고단하고 힘들수록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절박한지 깨닫습니다. 어제 코로나 시대는 물론 언제나 ‘5적’의 삶을 살겠다 다짐했습니다.
“1.적게 자고, 2.적게 먹고, 3.적게 쓰고, 4.적게 말하고, 5.적게 다니고”
의 5적입니다. 5적의 실천으로 남는 시간과 힘은 하느님 찾기에, 하느님 공부에, 하느님 사랑에, 하느님 기도에 쓰기로 내심 작정했습니다. 새벽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강론 주제 내용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정은 기도와 하느님 말씀과 섬김 안에서 살아난다.” 바꿔말해 ‘가정은 하느님 안에서 살아난다’라는 말인데 믿는 모든 사람이 그러할 것입니다. 어제 시간경중 새롭게 마음에 와닿은 시편 성구입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오며,
당신의 말씀을 기다리나이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나이다.”(시편130,5-6)-
하느님 중심의 삶에 시편기도의 생활화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기도해야 삽니다. 강론을 쓰는 도중에도 끊임없이 찬미기도 바치는 풀벌레들 노래 소리, 하느님의 생음악이 참 마음 편안하게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저절로 답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주님과의 대화인 기도는 뒤따릅니다. 기도를 잘하고 싶은 청정욕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은 단하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온맘으로, 온몸으로, 온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 사랑은 저절로 갖가지 수행을 통해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 고백기도는 그대로 이사야의 심중을, 수난시 예수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했기에 이런 고백기도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에 강해지는 내적힘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내게 다가와 보아라.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기도는 테크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하느님 앞에서 사랑의 침묵중에 고요히 머무는 것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삶자체가 기도입니다.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둘이자 하나입니다. 기도없는 삶은 공허空虛하고 삶이 없는 기도는 맹목盲目입니다.
둘째, 배움입니다.
배워야, 공부해야 합니다. 무슨 배움, 무슨 공부입니까? 하느님 배움, 하느님 공부입니다. 세상 공부 아무리 많이 해도 영의 눈, 지혜의 눈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지와 허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빠진 공부, 말그대로 헛된 공부입니다. 하느님 공부와 참 나의 공부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알수록 참 나를 알아 겸손과 지혜, 순수와 진실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인생에서 사랑을, 겸손을, 섬김을 또 무수한 수행을 배워야 하는 주님의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 예수님께 크게 배우지 않습니까?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멋진 신앙고백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베드로의 이해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의 본격적 제자교육이 뒤따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 무지한 베드로는 크게 반발했고 주님의 호된 질책이 뒤따릅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사탄은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반석의 바위에서 졸지에 걸림돌로 전락된 베드로입니다. 누구든 하느님의 일이 아닌 사람의 일만 생각하면 졸지에 사탄이 되어버립니다. 이런 유혹의 위기를 직감할 때 즉시 ‘사탄아, 물러가라!’ 내심 크게 외치고 벌떡 일어나 제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새삼 삶은 배움의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아마 예수님의 호된 꾸지람을 통해, 가르침을 통해 베드로의 메시아관도, 예수님께 대한 이해도 참으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죽는 그날까지 배우고 체험해야 할 주님의 파스카의 신비입니다. 참으로 초발심의 자세로 겸손히 한결같은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주님의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처럼 날로 비워지고 겸손해짐으로 점차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셋째, 따름입니다.
주님을 따라 사랑을, 섬김을 실천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말로만의 사랑이, 믿음이 아니라 행동으로 입증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바로 실천으로 입증되는 믿음은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가 특히 강조합니다. 사랑도 믿음도 실천의 동사입니다. 그러니 실천이 없는 사랑,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사랑, 죽은 믿음입니다.
주님 믿음과 주님 사랑의 진위는 제 십자가를 지고 한결같이 주님을 따름에서 확인됩니다. 믿는 이들 모두에게 당신을 따를 것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순교 성월 9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8,34-35).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평생,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따르는 십자가의 길, 파스카의 길 하나뿐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기꺼이 기쁘게 주님을 따라 끝까지 제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좌우명 고백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