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9.26.연중 제26주일 민수11,25-29 야고5,1-6 마르9,38-43.45.47-48
행복한 삶
-예닮의 여정-
집무실의 책꽂이를 일별하던중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한 삶’이 한눈에 들어왔고 지체없이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지혜는 곧 행복한 삶이요 어리석음은 불행이다’, ‘진리에 도달함으로써 우리는 행복해진다’, ‘지혜로운 사람의 정신에만 행복한 삶이 깃든다’, ‘참행복은 진리인 하느님의 관상’이라는 말마디도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어지는 성인의 고백입니다.
“당신 친히 곧 그들의 기쁨이십니다. 당신 곁에서, 당신을 두고, 당신 때문에 기뻐함, 그것 자체가 바로 행복한 삶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행복은 없습니다.”
흡사 시편의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 고백을 연상케 합니다. 행복은 멀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오늘 지금 여기 있습니다. 행복의 원천인 주님과 함께 있음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행복기도의 다음 고백도 이와 일치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행복의 ‘만듬’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삶은 누구나의 권리요 책임이자 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행복의 열쇠입니다. 예전 나눴던 자작시 행복도 생각납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 향한 내 사랑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새로워지고 좋아지고 깊어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이래서 예수님 닮기의 예닮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며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와 더불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해야 합니다. 한번 뿐이 없는 삶, 행복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자 권리요, 하느님이 최종 심판정에서의 물음도 ‘너는 행복한 삶을 살았는가?’일 것입니다. 어떻게 행복한 삶을,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겠는지 그 구체적은 방법을 나눕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다음 수행도 원활해 질 것입니다.
첫째, 관대한 마음을 지니십시오.
주님은 너그럽고 자애로우십니다. 주님을 닮아 참으로 관대하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한테 있고 답은 주님 안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닮아감으로 계속 마음을 넓혀감이 답입니다. 나의 한계에 좌절할 때 마다 한없이 높고 넓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느님 마음을 닮는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1독서 민수기의 모세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주님께서 모세와 말씀하시고 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 주셨고 그들은 예언을 합니다. 마침 진영 안에 머물러 있던 엘닷과 메닷에게도 영이 내려 예언하자 이에 당황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모세에게 이를 말리라 강권합니다. 모세의 답이 참 통쾌합니다. 모세의 마음은 그대로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정말 하늘 같이 넓은 하느님 마음을 닮은 모세입니다. 이런 장면과 흡사한 장면이 오늘 복음의 제자 요한과 스승이신 예수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고 이를 막았다고 의기양양하는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답입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입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이웃에 대한 하느님의 은혜에 시기, 질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는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요 이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조임금이 이순신 장군을 시기했기에 이순신 보다는 원균을 추켜 세웠고, 또 율곡을 시기했기에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습니다. 선조임금이 특별히 나빠서가 아니라 시기, 질투는 우리의 본능적, 보편적 정서요, 이를 지양止揚하고 관대한 마음을 지녀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평생 수행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탐욕을 자제하십시오.
무지의 시기猜忌요 무지의 탐욕입니다. 무지의 병이 참 깊습니다. 창세기의 원죄 역시 결국은 인간의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을 지칭한다 생각이 듭니다. 온통 탐욕에서 기인한 타락상 가득한 세상입니다. 지옥에는 한계가 없다 합니다. 바로 무한한 탐욕의 내면이, 세상이 지옥입니다. 탐욕은 맹목盲目이라 눈이 없습니다. ‘지혜의 눈(혜안慧眼)’을 지녀야 비로소 통제되는 탐욕입니다. 무지의 탐욕에 대한 처방은 하느님의 지혜요 사랑뿐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2독서 야고보 사도입니다. 부자들의 탐욕을 질책하는 야고보는 그대로 스승이신 예수님을 대변합니다. 그대로 오늘의 탐욕의 부자들은 물론 우리를 회개에로 이끄는 야고보 사도의 예언적 외침입니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 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옷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깨달은 이들에게는 언제나 마지막때입니다. 하늘에 쌓아야 보물을 땅에 쌓는 어리석은 탐욕의 부자들입니다. 양극화로 치닫는 시대, 누구보다 부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이요 우리 내면의 탐욕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예언자 야고보 사도의 외침은 너무나 구체적이요 현실적입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곡식을 거두어들인 일꾼들의 아우성이 만군의 주님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현실을 직시하는 지혜의 눈이, 불의의 피해를 호소하는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대해 마음의 귀를 기울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혼자서가 아닌 더불어의 행복에 탐욕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나누는 삶이, 또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삶이 얼마나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셋째, 죄를 짓지 마십시오.
죄의 유혹에 빠지지도 말고 이웃을 죄에로 유혹하지도 마십시오. 이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주님의 기도가 간절할 수 뿐이 없습니다. 죄로 인한 고통은 얼마나 큽니까? 아무리 밖에서 좋게 잘 봐줘도 죄로 인해 안으로부터 부패하고 무너져 내리면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사랑해도 턱없이 부족한 인생인데 죄로 인해 낭비되고 파괴되는 삶의 피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죄는 영혼의 암癌과 같습니다. 크고 작은 죄가 없습니다. 죄라면 무조건 배척해야 하고 무엇보다 고백성사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시스템과 같은 기도와 공부와 일이 조화된 삶중에 끊임없는 회개로 죄가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죄에 대한 처신은 얼마나 단호한지 충격적입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네 손이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버려라.”
그대록 충격요법의 표현입니다. 죄의 결과가 영혼의 파괴에 얼마나 치명적인지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호히 죄를 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지체없이, 끊임없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죄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죄의 도구가 아니라 사랑의 도구, 주님의 도구로 쓰여야할 우리 몸의 지체인 손, 발, 눈입니다.
주님을, 이웃을 사랑함이 죄에 대한 최고의 처방이요 예방이요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죄를 지을수록 회개와 더불어 온힘을 다해 주님과 이웃을, 자연을 사랑할 때 영육의 치유와 건강이요 행복한 삶입니다.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은 선택이자 발견입니다. 참으로 사랑을 선택하여 실천할 때 발견되는, 선물처럼 주어지는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입니다. 구체적으로 관대한 사랑, 탐욕을 자제하는 사랑, 죄를 짓지 않는 사랑을 선택하여 이런 사랑 실천에 올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의 열쇠는 사랑뿐임을 깨닫습니다. 예닮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항구하는 길뿐이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사랑의 예닮 여정에 항구함으로, 행복한 삶, 지혜로운 삶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