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5.연중 제27주간 화요일 요나3,1-10 루카10,38-42
활동 안에서의 관상
-경청, 환대, 회개-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 중요한 영적 삶의 진리를,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영감과 깨우침을 줍니다. 라자로, 마르타, 마리아 삼남매가 사는 베타니아의 집은 예수님이 자주 편히 찾았던 ‘환대의 집’이었습니다. 삼남매 역시 예수님을 사랑했으며 예수님의 삼남매에 대한 사랑 역시 각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수시로 베타니아 환대의 집을 찾았듯이 요셉 수도원 역시 환대의 집처럼 수시로 많은 사람이 찾습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가 참 절묘합니다. 앞서의 어제 복음인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이어 곧장 마르타와 마리아가 방문하신 예수님의 환대 장면이 펼쳐집니다. 착한 사마리안의 자비행의 비유가 절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섬김을 참 강조한 주님이셨지만 그에 앞서 주님 말씀의 경청과 환대가 우선임을 깨우쳐줍니다. 이래야 섬김의 활동에 치우쳐지는 불균형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먼 과도한 번아웃(burn-out)의 섬김의 활동이 아니라 눈밝은 관상과 활동이 조화된, 활동 안에서의 관상적 삶이 되어야 참 영적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우선적인 것이 경청의 환대로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며, 주님 말씀을 경청함으로 환대하는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맞아들였지만 분주한 음식준비 활동에 여념이 없고,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경청합니다. 마르타와 달리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선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함으로 주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입니다. 활동에 우선하는 말씀의 경청이자 관상임을 깨닫습니다.
“들어라!”
소통의 대화와 기도에 우선적인 것이 들음입니다. 상담이나 고백성사 역시 우선 잘 듣는 것이 기본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의 맨처음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 아들아’입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라고 합니다. 예언서에도 수시로 등장하는 것이 주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노자 강의 시에도 성인聖人은 잘 듣는 자라는 말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성인聖人의 거룩할 ‘성聖’자의 한자 맨먼저 나오는 ‘귀 이耳’자가 들음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참 지혜로운 관상의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우선 경청합니다. 바로 잘듣는 경청 이것이 주님은 물론 사람 환대의 기본입니다. 이래서 성찬전례에 앞선 말씀전례의 미사구조입니다. 렉시오 디비나 성독의 과정 역시 경청의 들음, 묵상, 기도, 관상으로 이루어집니다. 바로 마리아는 주님 환대와 주님 말씀의 렉시오 디비나를 동시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 경청을 통한 환대가 있어야 비로소 관상과 활동이 균형과 조화를 이룬 참된 영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같은 자비행에 앞서 필히 말씀 경청의 환대와 관상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낮동안 섬김의 활동에 앞서 반드시 외딴 곳에서 아버지와의 일치인 친교의 관상기도에 몰두했습니다. 말 그대로 ‘활동 안에서의 관상(contemplation in action)’으로, 삶의 중심에 ‘관상의 샘’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거룩한 전례가 끊임없이 거행되는 ‘성전’입니다.
이어지는 마르타와 예수님의 대화가 우리의 관상과 활동의 삶을 뒤돌아 보게 합니다. 혹시 활동에 탈진한 삶을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절대 예수님은 과도한 짐이 되어 내적평화를 잃게 하는 섬김의 활동은 원하지 않습니다. 분주히 과도하게 주님 맞이할 식사준비의 일을 하다 보니 내적평화를 잃은 마르타임이 분명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말 그대로 마르타의 순수한 사랑의 동기에도 불구하고, 주님 뜻대로가 아닌 자기 뜻대로의 일방적 열심의 눈먼 환대입니다. 전혀 주님의 심중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없었습니다. 주님과 마리아에 대한 불만으로 내적평화를 잃은 마르타의 내심을 보여줍니다.
분명코 단언하건데 예수님이 원하는 우선적인 것은 당신 말씀의 경청입니다. 현대판 이단은 일중독에 이르게 하는 활동주의란 토마스 머튼의 말도 생각납니다. 다음 말씀은 우리의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어찌보면 활동에 경도된, 관상적 차원을 잃은 마르타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말그대로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 사랑의 충고입니다. 얼마나 마르타를 사랑하는 예수님이신지 깨닫습니다. 마르타가 보기에 일도 하지 않는 여유작작한 마리아의 모습이 몹시도 불편하고 샘도 나고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크나큰 오해임을 알아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최고의 활동 형태는 관상(the highest form of activity is contemplation)’이기 때문입니다.
새삼 말씀의 경청과 묵상, 기도, 관상의 렉시오 디비나 시스템의 실천과 함께가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경청과 회개는 동시적 영적현상입니다. 비단 렉시오 디비나는 성경에만 국한되는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공동전례기도뿐 아니라 전 삶으로 확장되고, 자연을, 삶을, 사회현실을 렉시오 디비나 하며 회개와 관상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시편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 시간 역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의 연장이요 회개의 여정에 참으로 결정적임을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기도와 성독과 일이 조화된 수도원의 일과표를 ‘회개의 시스템’이라 명명합니다. 이런 회개의 시스템같은 일과표의 준수를 통해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를 통해 관상적 삶도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나서의 주제도 회개입니다. 앞서 독서는 생략되었지만 요나는 어제 화답송 후렴에서 보다시피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의 기도를 바치고 살아납니다. 회개를 통해 새롭게 부활한 요나가 니네베에 가서 회개를 선포합니다.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회개를 위한 40일의 유예기간이 주어졌고, 말씀을 경청한 네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의 실천이 참 신속합니다. 경청과 회개가 동시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여기 구원의 여정에서 숫자 40이 상징하는 바도 의미심장합니다. 창세기의 홍수도 40일이 걸렸고, 엘리야는 40일을 호렙산을 향해 걸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을 광야에서 방황했고,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단식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40일후에 승천하셨으며 우리의 사순시기도 이런 영적 사실에 근거합니다.
마침내 요나의 회개 선포 말씀에 즉각 경청하여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시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던 재앙을 완전히 철회합니다. 참으로 이런 전국적인, 세계적인 생태적 회개가 절박한 절체절명의 작금의 현실입니다. 경청의 회개와 환대에 따른 구원의 축복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