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6.연중 제30주간 화요일 로마8,18-25 루카13,18-21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겨자씨같은 사람, 누룩같은 사람-
오늘 겨자씨의 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짧지만 상징하는바 무궁무진합니다. 많은 경우에 해당됩니다. 무엇보다 이 두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정체가 환히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단적으로 예수님이 이에 해당됩니다. 겨자씨같은 예수님이, 누룩같은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예수님을 닮아 겨자씨같은 사람이요 누룩같은 사람입니다. 하늘 나라는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구체적이나 장소를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은 겨자씨같은 사람이, 누룩같은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문득 누룩하니 생각나는 강론 내용이 있습니다. 누룩은 효소가 아닙니까? 여기서 착안한 발효인생과 부패인생입니다. 발효인생에는 향기가 납니다만 부패인생에는 악취가 납니다. 성령의 효소로 끊임없이 발효시킬 때 향긋한 발효인생이나 성령의 효소없이 방치하여 내버려두면 부패인생의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발효인생의 결정적 모범이 예수님과 바오로 사도 및 무수한 성인들입니다. 과연 나는 발효인생인지 부패인생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발효인생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사람들이라면 두말 할 것 없이 발효인생입니다.
정말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겨자씨같은 사람이요 누룩같은 사람입니다. 공동체 역시 우리 요셉수도공동체처럼 겨자씨같이 성장하는 살아 있는 공동체가 있고 누룩과 같이 주위를 성숙으로 부풀리는 살아 있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이때 ‘하느님의 나라’라는 꿈의 실현입니다.
그러니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겨자씨같은 사람이나 공동체를 통해, 누룩같은 사람이나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새삼 죽어서 가는, 또 어디 밖에 있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 모두가 살아내야 할 과제가 하느님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를 보여 준다면 그대로 최고의 복음 선포가 될 것입니다.
겨자씨가, 누룩이 상징하는 바 무궁무진입니다. 믿음의 겨자씨와 믿음의 누룩, 희망의 겨자씨와 희망의 누룩, 사랑의 겨자씨와 사랑의 누룩, 진리의 겨자씨와 진리의 누룩, 선의 겨자씨와 선의 누룩, 아름다움의 겨자씨와 아름다움의 누룩, 말씀의 겨자씨와 말씀의 누룩 등 무궁무진합니다. 참으로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사랑이 담긴 말이나 글, 행동 역시 겨자씨가 될 수 있고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따뜻한 미소, 환한 웃음 역시 겨자씨와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겨자씨와 누룩이 상징하는 바 하느님의 힘, 성령의 힘입니다. 이런 겨자씨와 누룩같은 사람이, 겨자씨와 누룩같은 것들이 우리를 정화하고 성화하며 끊임없이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하게 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영적으로 성장하는 겨자씨가 되고, 영적으로 안팎으로 성숙하여 부풀리는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성인이고 공동체를 만듭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닮아 끊임없이 내적 영적으로 성장하는 겨자씨가 될 수 있고, 예수님을 닮아 끊임없이 주위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영적 누룩, 사랑의 누룩으로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셋을 들고 싶습니다. 1.끊임없는 기도, 2.끊임없는 회개, 3.끊임없는 말씀공부와 실천입니다.
평생 이렇게 기도와 회개와 말씀 공부의 주님의 학인, 주님의 전사, 주님의 형제, 주님의 수행자로 살아감으로 날로 예수님을 닮아간다면, 참 좋은 끊임없이 내외적으로 성장하는 겨자씨가, 또 주위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누룩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룩과 같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닮아 겨자씨 같은 사람이, 누룩같은 사람이 될 때 우리 또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에 더하여
“너희는 겨자씨와 같다
너희는 누룩과 같다.” 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성인들이요 이렇게 살아갈 때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를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빛나는 모범이 예수님에 이어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교회공동체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겨자씨같고 누룩같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빛나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모범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희망의 겨자씨, 희망의 누룩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희망이 있어야 믿음도 있고 인내도 있습니다.
우리를 희망의 누룩으로 부풀리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희망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고난을 견딜힘도 고난을 상대화 객관화할 수 있는 힘도 희망의 힘입니다. 희망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이요 성령의 힘입니다.
비전이 없다, 희망이 없다, 꿈이 없다 탄식한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궁극의 비전이자 희망이요 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우리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하느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청정욕은 얼마든 좋습니다. 사실 이보다 이웃에 좋은 선물도 없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원대한 비전을 들어보세요.
“장차 우리에게 계시될 영광에 견주면, 지금 이 시대에 겪는 고난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지배아래 든 것은 자의가 아니라 그렇게 하신 분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피조물의 해방까지 내다보는 바오로의 원대한 비전이자 꿈입니다. 이어지는 희망의 말씀도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그대로 희망의 누룩같은, 희망의 겨자씨 같은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궁극의 희망의 원천은 하느님이자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말씀의 겨자씨와 성체의 누룩 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정화하고 성화하여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며 살게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