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삶 -기도와 성소,죽음-2021.10.28.목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Oct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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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0.28.목요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축일                                     에페2,19-22 루카6,12-19

 

 

 

하느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삶

-기도와 성소,죽음-

 

 

 

‘나는 누구인가?’ 때로는 신원의 위기의식에 자문해 보기도 할 것입니다. ‘수도자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사실 50대를 넘어서면 나름대로 자기를 찾게 됩니다. 어제도 오랜만에 수도원을 찾은 50대 중반의 자매와 면담고백성사중 만남이 생각납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행복의 객관적 조건은 다 지녔네요. 기도하시고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세요. 사랑하여 주님을 알수록 나를 알게 됩니다. 기도도 사랑도 항구한 노력입니다.”

 

이어 보속으로 다음 이사야서의 처방전 말씀을 써드렸습니다.

“너 카타리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이사43,4ㄱ).

말씀을 써드리고 강복을 드린후,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느님은 이렇듯 자매님을 사랑하십니다. 바로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매님, 바로 이것이 자매님의 모습입니다.” 

 

덕담과 더불이 살몃이 안아 드렸고, 자매님도 저도 활짝 웃으니 참 마음이 밝아지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부르심의 성소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확연히 드러납니다. 하느님 없이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합리주의 철학자 데칼트의 언명대신, ‘나는 불림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의 언명에 공감합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그대로 하느님께 불림받은 성소자들의 모습을 기막히게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불림받고 싶은 강렬한 갈망이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께 불림받아 ‘그분의 꽃’으로 존재감 충만한 삶을 살게된 오늘 복음의 열두 사도들이자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불림받은 이름이 본래의 이름이라 하여 세례명을 본명本名이라 부릅니다. 사도 바오로가 교회내 우리의 신원을 잘 밝혀줍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로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여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하느님의 한 가족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열두사도나 우리가 주님께 불림받지 않았다면 우리의 인생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요. 여기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새삼 성소의 무궁한 신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 불림받은 열두사도의 면면이 참 다채롭습니다. 하나하나 고유의 유일무이한 성소자들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사도로 불림받으므로 비로소 참으로 존재하게 된 제자들입니다.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양한 이들이 공동체가 참으로 풍요롭고 아름답습니다. 그대로 우리 열두명의 수도형제공동체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은 열두사도중 ‘열혈 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사도의 축일입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히브리어로 “셰마Shema”인데 “셰마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아 들어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타대오로 불리는데 타대오의 말뜻은 사랑스럽다 라는 의미입니다. 불림받은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할 때 사랑스런 존재가 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문헌인 ‘시몬과 유다의 수난기’에는 두 사도가 함께 시리아와 소아시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으며, 페르시아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시몬은 톱에 잘려 순교했고, 유다는 창에 찔려 순교했으며, 두분 다 함께 활동하다가 순교했다는 전승에 따라 오늘 10월28일 동시에 축일을 지냅니다.

 

순교는 주님의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순교를 통해 부르심의 성소에 끝까지 충실했던 순교성인들의 순교 믿음은 언제 대해도 가슴 먹먹한 감동이요, 순교적 삶에 더욱 충실해야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기도와 중심, 그리고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사도를 택하기 전 밤을 새우며 기도했고 이어 열두사도를 택합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 삶에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복음 후반부의 군중들 역시 그리스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교회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 온 사람들이었고, 더러운 영들에 시달리는 이들이 예수님을 만나 다 낫게 되니 그대로 기도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묘사도 은혜롭습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힘은 그대로 기도의 힘이자 하느님의 힘입니다.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쓰는 병자들의 간절한 믿음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치유의 은총입니다. 똑같은 파스카의 예수님께서 함께 하는 미사시간 우리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기도가 답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 삶의 일치를 위해, 각자 성소에 충실하기 위해, 순교적 삶에 항구하기 위해, 또 복된 선종의 죽음을 위해 답은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엊그제는 노태우 전임 대통령이 서거했고, 요셉수도원의 은인인 매듭전문가이자 무형문화재 김희진 율리안나 자매가 선종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깨어 살게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교회 공동체에 깊이 하나로 결속된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을 깊이하기 위하여 교회 공동체가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성전에서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매일 미사의 공동전례기도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교회의 심오한 모습이 다음 에페소서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이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에 이런 교회 공동체의 은혜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중에 계속 ‘자라나고’ ‘지어지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중에 있는 살아 있는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러니 교회 공동체를 떠난 기도와 믿음은 얼마나 허약하고 위태한 지요! 주님은 날마다의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교회공동체를 살려 주시고, 우리의 성소와 믿음을 북돋아 주시며, 영육의 질병도 치유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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