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聖人의 삶 -지상에서 천국天國을-2021.11.7.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07, 2021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2021.11.7.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1열왕17,10-16 히브9,24-28 마르12,38-44

 

 

성인聖人의 삶

-지상에서 천국天國을-

 

 

천국의 한자를 찾았더니 다음과 같이 세 뜻의 설명이 참 은혜로웠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뜻은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성인의 삶이 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1,이 세상에서 올바르게 살다가 죽은 후에 갈 수 있다는 영혼이 영원히 축복받은 나라.

2.하느님이 지배하는 은총과 축복의 나라.

3.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평화로운 곳이나 상황.

 

천국의 반대인 지옥地獄도 찾아봤습니다.

1.중생이 지은 죄업으로 죽어서 간다고 하는 지하의 세계.

2.큰 죄인으로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원히 벌을 받는다는 곳.

3.못견딜만큼 괴롭고 참담한 형편이나 환경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교통지옥, 입시지옥).

 

적고 보니 천국도 지옥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도 불행도, 희망도 절망도, 생명도 죽음도 선택이듯 천국도 지옥도 성인도 죄인도 선택입니다. 성인의 삶을 선택하여 끊임없이 회개의 삶을 살면 성인입니다. 

 

한마디로 오늘 지금 여기서 구원자 주님을 선택하여 살면 그대로 천국에서의 성인의 삶입니다. 잘 선택할 수 있음은 또한 은총임을 깨달으니 선택의 은총입니다. 때로 산책중 즐겁게 부르는 화답송 시편 셋도 생각납니다.

 

1.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2.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3.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며칠전 어느 자매님이 고백성사후 눈물 지은후 환한 얼굴, 환한 눈빛의 아름다움에 감동되어 살몃이 안아드리며 “고백성사 받음을 축하드립니다.” 드린 축하인사도 생각납니다. 어제도 몇 년전의 체험이 있었고 이 또한 저에겐 평범한 일상에서의 천국신비체험입니다.

 

집무실 문을 여는 순간 한눈에 들어 온 단풍 곱게 물든 별세계 같은 현실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죽음의 문이 열릴 때, 주님이 계신 천국의 아름다운 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듯 했습니다. 바로 지상에서 살면서도 하느님 계신 하늘에 희망을 두고 살 때 지상천국의 삶을 사는 성인이 될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파스카 그리스도 예수님이 계신 하늘입니다. 다음 히브리서의 고백이 고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일한 한 번이자 절대적인 효력을 지닌 희생제사를 보여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은혜로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희망을 현재화, 활성화 해주는 미사은총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고대하는 우리들을 구원하시려고 죄와는 상관없이 두 번째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두 번이 아니라 매일 미사를 통해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끊임없이 임재臨在하시는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과 함께 살 때 지상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겠고, 그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 가난한 과부입니다. 가난한 과부에게 드리고 싶은 두편의 헌시獻詩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새롭게 느껴지는 옛 자작시입니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주님은 은총의 선물같은 시詩를 통해 희망과 기쁨, 위안과 치유의 구원을 주셨음을 지금에서야 소스라치게 깨닫습니다. 참 고맙고 신비롭게 생각되는 것이 힘든 때일수록 기억에 생생한 시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방에 있는/TV, 그림, 사진 등/대부분이 군더더기/쓸데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임 만드신/창문밖 하늘 풍경

살아 계신 하느님 그림/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방 하나만 있어도/부러울 것 없겠네!”-2005. 봄

 

“별들이 땅을 덮었다/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 나뭇잎들/하늘 향한 사모의 정 깊어져/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온 땅을 덮었다/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황홀한 기쁨/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2005. 가을

 

그러니 역설적으로 가난한 과부는 가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살지만 눈길을 지상 넘어 천상에 두고 있었음을 봅니다. 주님의 눈길도 늘 그를 향했고 과부의 눈길 또한 주님을 향했음을 봅니다. 이점에서는 제1독서 열왕기 상권의 사렙타 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 예언자를 통해 사렙타 과부를 찾아 살려 주신 주님은 오늘 성전에서 생활비 전부를 헌금궤에 넣는 가난한 과부를 예의銳意 주시注視하십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입니다. 평신도의 모범을 보여 주는 가난한 과부요 그녀의 영성을 본받고 싶습니다. 마침 어제 카톨릭 신문은 신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된 정순택 대주교님에 대한 기사로 가득했습니다. 

 

깊은 영성, 온유, 겸손, 친절, 경청을 대주교님의 특징으로 꼽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영성이자 평신도 영성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체적으로 셋으로 요약되는 오늘 복음의 가난한 과부의 남다른 위대한 성덕의 모습입니다. 율법학자들이나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는 부자들과는 판이한 모습입니다.

 

정말 하느님 눈에는 누가 훌륭한 사람인지, 누가 성인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위장이나 가면이 통하지 않습니다. 얼마전 지혜를 겸비한 노수녀님과 공감하며 나눈 대화도 생각납니다. ‘나이들어 죽음에 가까워지는 노년에 들면 모두가 평준화된다, 죽음 앞에서는 완전 평등해진다’라는 진리입니다. 재물도, 지위도, 학위도, 학식도, 젊음도, 힘도 점차 사라지고 남는 것은 진선미, 신망애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인지, 참으로 진실하고 성실한 믿음의 착하고 어진 사람인지 하나만 남는 다는 것입니다. 남는 것은 단 사람 하나뿐임을 깨닫는 것이 공동체 생활의 은총입니다. 살다보면 박사학위도 덮여져 가고 삶앞에서는 참 하잘 것 없어 보입니다. 세월 흘러갈수록 퇴색해져 희미해지는 세상박사들과는 달리 날로 생생히 빛나는 생활박사들 성덕의 빛입니다.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사랑과 섬김, 온유와 겸손, 진실과 성실의 생활 박사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복음의 가난한 과부는 영성의 최고봉에 도달한 평신도 성인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허영의 거품이 걷힌 완전히 본질적 깊이의 참행복한 성녀, 가난한 과부의 삶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사람들로부터의 허영의 이탈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들의 시선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다 보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일희일비하다 보면 결코 내적평화는 없습니다. 

 

겉옷을 입고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윗자리를 탐하며,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는 외적인간을 상징하는 율법학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내적인간의 성녀 가난한 과부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겉모습에 치중하다 자신을 잃는 어리석은 율법학자와 너무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주님 앞에서 참 나를 살았던 가난한 과부였습니다.

 

둘째, 재물로부터의 탐욕의 이탈입니다.

무욕의 지혜요, 무욕의 부자입니다. 최소한도의 필요로 충분한자가 정말 부자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 많아도 끝없는 탐욕에 목마른 자라면 영원히 빈자일뿐입니다. 복음의 부자들의 헌금하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가난한 과부입니다. 하느님께 전적 위탁의 믿음이 있었기에 생활비 전부를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으로 밖으로는 가난해도 안으로 하느님 한분을 모심만으로 행복한 부자였던, 내적부요의 성녀 가난한 과부입니다.

 

셋째, 지위로부터의 권력욕, 명예욕의 이탈입니다.

지위에 따라 변질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듭니다. 그렇게 좋던 사람이 자리에 오르니 변합니다. 변질이 아니라 숨어있던 본질이 드러난 것인지 모릅니다. 이런 자리에 관계 없이, 어떤 자리에 있던지 한결같은 진실하고 겸허한 모습이라면 얼마나 멋있고 매력적이겠는지요!

 

동병상련, 이심전심입니다. 가난한 과부를 통해 선명히 드러나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가난한 과부, 지위와 자리가 전무한 참 초라한 모습이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고 자연스럽고 당당합니다. 참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늘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과 눈맞춤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눈에는 더도 덜도 아닌 나일뿐입니다. 어떤 가면도 통하지 않습니다.

 

누가 뭐래도 하느님 앞에 떳떳하면 삽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보아주지 않아도 하느님만 알아주면, 보아주면 행복합니다. 탈속의 가난한 과부는 온갖 가면들이 필요없던 성녀였습니다. 참으로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고, 재물로부터 자유롭고, 지위로부터 자유로웠던 참 아름답고 평화롭고 진실했던 행복한 영혼의 성녀였습니다. 

 

이런 가난한 과부와 비교할 때 복음의 율법학자들과 많은 돈을 헌금하던 부자들은 얼마나 초라해 보이는지요! 밝게 빛나는 영혼의 가난한 과부와 빛을 잃어 어둬진 영혼의 율벅학자들과 부자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으로 이탈의 초연한 자유인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Articles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