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 -예수님이 답이다-2021.11.15.연중 제33주간 월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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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5.연중 제33주간 월요일 

1마카1,10-15.41-43.54-57.62-64 마르13,24-32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

-예수님이 답이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삶중에

주님이신 당신을 만나니

당신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선물, 개안의 감격, 개안의 기쁨을 노래한, 그동안 수없이 나눴던 제 행복기도중 일부 내용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을 만나 눈이 열린 어떤 눈 먼이의 심정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무지에 눈 먼, 참 역설적이게도 눈 뜬 무지의 맹인들 무수한 현실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질병이 바로 눈멀게 하는 무지입니다. 무지의 약, 무지의 죄, 무지의 병, 참으로 제가 많이도 강조했던 내용입니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입니다. 불교 용어지만 제 좋아하는 말마디중 하나가 눈이 열린다는 개안開眼입니다. 개안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참으로 예수님을 만날 때 개안의 은총, 사랑의 개안입니다. 개안의 은총, 개안의 여정은 그대로 깨달음의 은총, 깨달음의 여정이란 말과 통합니다. 

 

역시 한 두 번의 개안이, 깨달음이 아니라 평생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깨달을 ‘각覺’자 안에 볼 ‘견見’자가 들어 있습니다. 깨달음은 개안에 직결됨을 봅니다. 개안의 깨달음과 더불어 치유의 구원에 날로 자유로워지는 영혼들입니다. 참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만날 때 개안의 깨달음이요 인생 무지와 허무의 어둠에서 벗어납니다.

 

오늘 복음은 ‘소복음mini-gospel’서라 할만큼 상징으로 가득하며 풍성한 깨달음을 선사합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어떤 눈 먼이가 상징하는 바 무지에 눈 먼 비참한 인간 실존, 바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여기서 제외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길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길이신 예수님을 만나 눈이 열리게 되는 극적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오늘 복음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 평생, 날마다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육신의 육안肉眼의 시력은 날로 나빠져도 영혼의 영안靈眼의 시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알려 주자 조건반사적으로 반응하는 눈 먼 걸인입니다. 그의 눈뜨고자 하는 갈망이,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습니다. 이런 갈망은 열망은 그대로 주님 향한 열렬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우리가 바칠 최종의 유일한 기도는 이 하나 자비송뿐입니다. 최종의 승리는 간절한 자에게 옵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을 만납니다. 다시 연이어 자비송 기도를 바치는 눈 먼 걸인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만일 이런 간절한 부르짖음의 자비송 기도가 없었다면, 주님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며, 눈먼 걸인은 평생 무지의 눈 먼 상태로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부지기 수일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유래하는 미사 시작전 자비송이요, 동방 교회의 ‘예수님 이름을 부르는 기도’입니다. 다음 예수님과 눈 먼 걸인이 주고 받는 대화는 절실하기가 불가佛家 고승高僧들의 선문답禪問答같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제가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바로 무지에 눈 먼 우리가 바칠 유일한 소원입니다. 참으로 필요한 단 하나는 지혜의 눈, 혜안慧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개안이요 혜안慧眼의 선물입니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간절한 열망의 믿음과 주님 은총의 말씀이 만날 때 개안의 선물입니다. 그대로 간절한 믿음으로 이 거룩한 미사에 참여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개안의 선물입니다. 그는 즉시 다시 보게 되었고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라나섰고 군중은 모두 그것을 보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니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참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바야흐로 길에서 길이신 주님을 만나 눈이 열려 주님을 따라 나서는 개안의 여정이, 추종의 여정이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새삼 주님을 보라 있는 ‘눈(眼)’이요, 주님을 찬양, 찬미하라 있는 ‘입(口)’이요, 주님을 따르라 있는 ‘다리(脚)’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그리스왕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치하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재앙의 현실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들의 하느님 믿음의 상실과 더불어 세속화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니 순수한 믿음은 오염되고 저절로 변절變節, 변질變質, 부패腐敗가 뒤따릅니다. 다음 묘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그들은 이민족들의 풍습에 따라 예루살렘에 경기장을 세우고, 할례 받은 흔적을 없애고 거룩한 계약을 저버리고 이민족들과 한통속이 되어 악을 저지르는 데에 열중하였다.’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흡사 오늘날의 광란狂亂사회, 중독中毒사회를 연상케 합니다. 제대로 된 정상 사회 현실이 아닙니다. 무지에 눈먼 자본주의 사회의 약육강식, 각자도생의 지옥도를 연상케 하는 미칠 광狂자 들어가는 광인狂人, 광기狂氣, 광신狂信, 광폭狂暴, 광분狂奔, 광란狂亂의 중독 공화국 같습니다. 부동산 광풍狂風을 어떻게 잠재울 수 있을런지요.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중독되어 미치면 폐인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눈 멀어 중독시키는 무지의 탐욕, 교만, 질투, 분노, 증오, 이념, 광신등 끝이 없습니다. 참사람 하나 만나기 힘든 시절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눈이 열려 참사람이 되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아가는 보물같은 이들이 그립고 그리운 시절입니다.

 

하느님이 사라진 중심 자리에는 무수한 악령들이 우상들이 자리잡기 마련이며 가속화되는 세속화, 중독화, 노예화로 서서히 자유를 잃고 참 왜소한 좀비로 전락해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무지에 대한 답은 단 하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개안의 여정, 깨달음의 여정, 자유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성인聖人이 되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개안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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