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 -한평생 맡겨진 책임을 ‘참으로’ 다하는 사랑-2021.11.17.수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1207-1231)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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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7.수요일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1207-1231) 기념일

2마카7,1.20-31 루카6,27-38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

-한평생 맡겨진 책임을 ‘참으로’ 다하는 사랑-

 

 

 

오늘은 이런저런 단상들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여기 요셉수도공동체 형제들은 지난 주일 11.14일 주일 저녁기도부터 11.20일 토요일 아침미사까지 박재찬 안셀모 도반 수도사제의 지도로 연피정을 하고 있습니다. 주제는 “토마스 머튼의 삶과 영성-Becoming Love(영적변화와 성장)-”입니다.

 

토마스 머튼! 1985년도 수련기때 참으로 심취하고 열광했던 당시 제 영적 우상이었습니다. 아마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왜관수도원내 도서실에 있는 영문판 서적은 물론 참 많은 책들을 읽었고, 33년전 대구가톨릭 신학대학원 졸업 제1회인 1988년 최초 석사논문 1호도 제가 쓴 ‘토마스 머튼의 관상’이었습니다. 

 

이제는 토마스 머튼을 졸업했지만(?) 당시는 토마스 머튼은 제 수도승 영성생활의 ‘전부’였습니다. 지금은 예수님이 제 사랑 전부이고 토마스 머튼은 전부중 ‘일부’일뿐입니다. 피정 주제중, Becoming Love(사랑이 되기)! 영어 말마디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갈망과 제 갈망이 일치가 된다 싶은 말마디였습니다. 한마디로 한평생 ‘사랑이 되고 싶은’, ‘사랑이신 하느님이 되고 싶은’ 존재론적 변화의 갈망인 것입니다.

 

이 사랑이 되고 싶은 갈망에서 모든 성인이 일치합니다. 오늘 기념하는 순교적 사랑의 삶을 살다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녀의 영적지도 신부였던 마르부르크의 콘라트의 증언입니다.

 

-“나는 하느님 앞에서 그녀에 대해 이 말을 하고 싶다. 이 여인만큼 관상에 깊이 젖어 들어간 이를 일찍이 본적이 없다. 사랑의 관상이다. 수사들과 수녀들이 여러 번 목격했듯이 그녀가 기도의 은밀함에서 나올 때 그 얼굴은 광채로 빛나고 그 눈에서 태양 광선과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전 나는 그의 고해를 들었다. 남기고 가는 재산과 의류를 가지고 무엇을 하면 좋겠느냐고 내가 물어보자, ‘자기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기 것이 아니고, 모두 가난한 이들의 것’이라고 대답하면서 자기가 입던 낡은 옷을 제외하고는(그옷을 입고 묻히기를 원했다), 전부를 가난한 이들에 나누어 달라고 간청했다. 

 

이 말을 마치고 주님의 몸, 성체를 영했다. 그리고나서 저녁기도때까지 자기가 전에 설교말씀에서 들은 거룩한 이야기를 되새겼다. 마침내 열렬한 신심으로 주위에 모인 모든 이들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면서 평온히 잠들 듯 숨을 거두었다.”-

 

말 그대로 ‘사랑이 된’ 관상가의 한생애였음을 봅니다. 제 수도원 숙소 복도 벽에 걸려 있는 ‘沈默(침묵)’이란 한자 목판이 새삼스럽게 감회에 젖게 했습니다. 수도원 초창기 부임시 그러니까 33년전 1988년 가을에 썼던 제 글씨입니다. 침묵의 사랑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침묵의 소중함이란 시중 한연이 떠올랐습니다.

 

“침묵은 사랑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사랑입니다.”

 

제가 어느 수도원에 가든 우선 확인하는 것이 셋입니다.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에 이어 수도원 묘지墓地입니다. 특히 수도원 묘지에 말없이 묻혀있는 사랑으로 살다가 사랑으로 묻힌 수도선배들의 무수한 묘와 더불어 십자가 표에 묘비명 없이 이름만 써있는 묘비석을 볼 때면 가슴 먹먹한 감동을 느낍니다. 

 

지난 2014년 안식년중 3개월 동안 한국 수도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 ‘뉴튼 수도원’에 머무는 동안 매일 찾았던, 예전 미국 수도자들이 묻힌 수도원 묘지였습니다. 묘비명들을 대하면 그분들의 생애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란 시의 마지막 연은 그의 묘비명으로 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라고 말하리라.”

 

이렇게 고백하고 떠나는 삶이라면 오늘 강론 제목대로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제 경우라면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시를 새긴 시비詩碑를 유언으로 부탁하고 싶습니다. 16년전 2005년 써놨던 “내 묘비명은”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장차 내 묘비명이 있다면 다음과 같았으면 좋겠다’에 이어 쓴 시입니다.

 

-“그는 욕심이 없었고 

평생 하느님만을 그리워했으며

그 무엇을 바라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오로지 하늘의 깊이와 넓이, 맑음만을 

어둔 밤 빛나는 별처럼 깨어 있음만을

하늘 떠도는 흰구름의 자유만을

산의 한결같은 인내와 침묵의 사랑만을 

바라고 부러워한 이

여기 주님의 품 안에 잠들다

 

그는 정말 다른 무엇도 바라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자연은 또 하나 그의 사랑이자 종교였다”-2005.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떠오른 단상들입니다. 믿는 이들 너나 할 것 없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의 한평생 삶입니다. 삶은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누구나 똑같이 선물로 받고 있는 하루하루의 삶이자 한평생의 삶입니다. 과연 선물인생이자 과제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사람마다 과제의 정도는 다 다를 것입니다.

 

과연 하느님 앞에 한평생 과제를 제출할 준비는 되어있는지요. 하루하루 과제를 제출하며 하느님 앞에 셈바치며 사는 삶을 습관화하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각자 그 이상을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것이 아닌 각자에 맡겨진 능력의 책임만큼만 기대하고 요구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그대로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남기든, 다섯 미나를 남기든 제 능력대로 맡겨진 책임에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결과의 양이 아닌 분투의 노력을 다한 결과만 보십니다. 이런 이들에 대해서는 예외없이 “잘하였다, 착한 종아!”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맡겨진 책임을 전혀 하지 않았던, 받은 은사를 사장시켰던, 무책임하고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태만했던 한 미나 그대로 였던 이에게는 “악한 종아!” 가차 없는 질책과 더불어 심판이 뒤따를 것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심판이요 아무도 탓할 수 없습니다.

 

인생사계로 압축해볼 때 어느 계절에 위치해 있습니까? 과연 사랑의 영적 열매들 풍성한 가을 인생인지요. 풍성한 사랑의 배열매들의 수확후 초겨울에 접어든 배밭 분위기는 말 그대로 넉넉하고 평화로운 ‘텅 빈 충만’의 분위기입니다. 흉작이라면 한없이 마음 쓰리고 쓸쓸한 ‘텅 빈 허무’의 배밭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인생을 뒤돌아 보게 하는, 배밭이 주는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어제의 엘아자르의 순교에 이어 일곱 형제와 그 어머니의 순교에 대한 일화입니다. 평소 하루하루 축적된 내공의 깊이를, 믿음의 깊이를 깨닫게 합니다. 몇날의 준비로 이런 사랑의 순교는 불가능합니다. 분명 하루하루 죽음 준비를 하며 주님 향한 한결같은 사랑과 믿음의 삶이었기에 배교나 변절함이 없이 참으로 책임을 다하는 거룩한 사랑의 순교입니다. 

 

참으로 가슴 먹먹하게 하는 순교장면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들입니다. 어머니의 책임을 다하는 사랑과 믿음을 보고 배운 일곱 아들들임이 분명합니다. 그 어머니에 대한 감동적 묘사에 이어 마지막 아들에 대한 부탁입니다.

 

-‘그 어머니는 일곱 아들이 단 하루에 죽어 가는 것을 지켜 보면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하게 견디어 냈다. 그는 조상들의 언어로 아들 하나하나를 격려하였다. 고결한 정신을 가득 한 그는 여자다운 생각을 남자다운 용기로 붇돋우며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 박해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형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여라. 그래야 내가 그분의 자비로 네 형들과 함께 너를 다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말 그대로, 부활의 승리를, 하느님의 궁극적 승리를 내다보는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로 충만한 그 어머니의 영혼입니다. 과연 나 같으면 어떤 처신을 했을런지요? 유비무환입니다. 언젠가 있을 죽음을 늘 눈앞에 환히 두고 하루하루 깨어 최선을 다하며 참으로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참 멋지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믿고, 참으로 희망하고, 참으로 사랑하며, 참으로 살 때 참으로 복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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