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여정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다-2021.11.30.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Nov 30,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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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30.화요일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로마10,9-18 마태4,18-22

 

 

믿음의 여정

-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다-

 

 

“형보다 앞질러서 예수님 따라/열정을 쏟으시어 생명가르친

 당신은 가련도한 우리보시어/복받은 여행길로 인도하소서.”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아름다운 아침 찬미가 한 대목입니다. 우리 믿음의 여정을 잘 인도해 주십사 사도께 전구를 청합니다. 어제 있었던 여러 예화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주로 읽었던 내용들입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라는 책이름에 “존엄사를 위해서라도 존엄삶을 이야기해야 합니다”라는 부제가 붙은 책소개 내용입니다. 죽음에는 정답이 없기에 가장 힘든 게 죽음일 것입니다. 

 

창간 30주년 만에 휴간한, 전 발행인 김종철의 딸이자 동지인 격월간 <녹색평론> 잡지의 편집인 김정현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제가 거의 20년 이상 지금까지 구독했던 잡지입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들임을 새삼 실감합니다.

 

“사실 이 일을 하면서 정말 힘든 건 돈이 없는게 아니다. 우리가 만드는 책에 반응이 없으면 힘이 빠진다. 30주년 이후 더 하기 어렵겠다고 생각한 가장 큰 이유였다. 1만명이던 독자수가 현재는 4000명쯤 된다. 이 수천명의 사람들을 위해서도 ‘녹색평론’은 존재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힘만으로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박경리 선생의 대작인 ‘토지’ 1993년판 서문에 나온 내용도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힘겨운 삶,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는 세상 모든 존재들을 만날 때 마다 느끼는 마음입니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애잔하다. 바람에 드러 눞는 풀잎이며 눈 실린 나뭇가지에 홀로 앉아 우짖는 작은 새, 억조창생 생명있는 모든 것의 아름다움과 애잔함이 충만된 이 엄청난 공간에 대한 인식과 그것의 일사불란한 법칙 앞에서 나는 비로소 털고 일어섰다.”

 

새삼 모두가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애잔한 눈에 밟히는 존재들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자각에서 끊임없이 샘솟은 무한한 연민의 사랑입니다. 박경리 선생도 세상을 떠난지 이미 오래이고 선생의 애지중지하던 고명딸 김영주도 2년전 73세 암투병중 세상을 떠났습니다. 2008년 통영 추모제에서 인터뷰 다음 대목도 잊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제가 점점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씀 자주 하신다. 거울을 보고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 자리에 서니까 눈물이 흐른다. 꼭 슬픈 마음은 아닌데 그냥 눈물이 나온다.”

 

고백성사시 또는 제 ‘행복기도’나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기도문을 읽을 때 울컥하며 흐르던 눈물의 형제자매들이 생각납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순수한 눈물입니다. 저절로 두손을 꼭 잡아드리게 됩니다. 어제 동영상을 보며 법정 스님의 생전의 수행자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누군가 법정 스님에게 물었다는 이 질문이 저에게는 화두처럼 남아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끊임없이 자문해야할 물음입니다. 오늘은 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입니다. 또 오늘은 서울 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이임 감사미사가 오전10시 구교좌 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됩니다. 추기경과 서울 대교구를 위해 기도부탁드립니다.

 

주님을 위해 순교한 안드레아 사도는 초대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입니다. 그리스어로 그리스도의 첫 단어인 X자형에 따라 X자형의 십자가에 못박혀 순교한 사도로 성인을 수호성인으로 한 스콧트랜드의 국기國旗도 여기에서 착안했음을 봅니다. 영국 국기의 X자 형도 여기에 근거합니다. 안드레아 사도는 스코트랜드에 이어 우크라이나, 러시아, 그리스, 루마니아 국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전설처럼 전해 오는 사도의 임종어입니다. 형장에 끌려갔을 당시 안드레아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양손을 높이 쳐들면서 기도하니 바로 임종어가 됩니다.

 

“오, 영광의 십자가여! 너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나를 부르시는가! 속히 나를 이 세상에서 끌어 올려 주님의 곁으로 가게 해 다오.”

 

참으로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죽음일지도 모릅니다. 과연 사는 것이, 죽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묻게 됩니다. 말 그대로 근원적인 실존적 물음입니다. 바로 이에 대한 답을 안드레아 사도의 순교축일이, 오늘 복음이 줍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에게 답은 이 하나뿐입니다.

 

주님이 불러 주셨기에 참으로 존재하게된 유의미한 우리들입니다. 부질없는 물음이지만, 복음의 제자들이나 또 현재의 우리들이 만약 주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세상에는 자기를 모르고 평생 무지의 어둠 속에서 허무하게 살다 죽는 이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새삼 주님과의 만남이 우연이 아닌 필연의 결정적 놀라운 은총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운명이자 사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만나 따름으로 우리 삶의 여정은 비로소 시작과 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삶의 방향과 목표, 삶의 중심과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결정적 전환점이 된, 부르심을 받은 네 사람의 어부들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어부들은 이제 주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믿음의 여정에서 부르심의 성소는 선물이자 과제임을 깨닫습니다. 한 두 번이 부름과 따름이 아니라 평생 매일 죽을 때까지 부르심의 선물에 응답해야 하는 과제가 따른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루하루 부르심에 잘 응답하여 따라 나서고 있는지요? 과거에 아무리 부르심에 응답해 잘 살았어도 현재 오늘 지금서 못살면 말짱 헛일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하루하루 날마다 끝까지 주님을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과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믿어 구원을 얻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나 혼자 구원이 아니라 더불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에 이어지는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바로 이 말씀에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음을 봅니다. 

 

성소의 선물은 복음 선포의 과제 수행으로 완성됩니다. 주님과 함께 복음 선포의 협조자로서, 하느님 나라의 증인으로서, 그분 수확의 일꾼으로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입니다. 완전히 예수님과 도반들과 공동운명체가 된 우리 믿는 이들의 성소입니다. 결정적인 온전한 성소는 마지막 죽는 그날까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바로 이것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삶은 허무도 무지도 아닙니다. 우리에겐 하루하루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영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날마다 우리 모두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주님과 함께 복음 선포의 사명에 충실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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