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2.15.대림 제3주간 수요일 이사45,6ㄴ-8.18.21ㅁ-25 루카7,18ㄴ-23
“오소서, 주 하느님”
-하느님 체험-
“오소서, 주 하느님!”
요즘 제가 즐겨 호흡에 맞추어 드리는 짧은 기도문입니다. 바꾸어 “오소서, 주 예수님!” 또는 아람어 그대로 “마라나타!”로 바꿔도 좋겠습니다. ‘체험하라’ 있는 하느님이요 ‘만나라’ 있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자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온 우리 수도자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루의 일과도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끝나는 우리의 일과입니다.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주어진 필생의 과제가 하느님을 체험하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신비가로 불림받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사실 눈만 열리면 어디서나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체험입니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순수의 전조前兆’라는 시의 첫연도 생각납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의 손바닥에 무한을 쥐고/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아라.”
바로 사소한 일상에서 이렇게 깨어 삶의 신비를 체험하며 깊이 사는 이가 신비가입니다. 사랑의 눈이 열리면 곳곳에서 만나는, 체험하는 하느님입니다. 특히 우리 정주의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평범한 일상의 삶의 제자리에서의 하느님 체험은 중요합니다. 어느 트라피스트회 수도승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장소에 대한 사랑! 나는 그것이 정주의 핵심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내 삶의 자리에 대한 애정이자 사랑이요 애착이다. 내 경우, 나를 끌어들인 것은 수도승들도 아니고, 삶의 방식도 아니고, 전통도 아닌 장소였다.”
이 트라피스트 수도승은 평범한 정주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체험했음이 분명합니다. 제 삶의 자리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 직결됨을 봅니다. 이것은 정주의 수도자뿐 아니라 인간의 공통적 정서입니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는 고향을 찾고, 또 자기가 살던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하는가 봅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을 떠나기전 자기가 사랑하던 정주의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행복한 이들은 몇이나 될까요.
인간의 근원적 마음의 병인 무지는 바로 하느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나도 모르고 너도 모릅니다. 안다해도 피상적으로 알뿐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하느님을 모르거나 까맣게 잊고 살았다면 얼마나 허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일이겠는지요! 허무와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하느님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존재 이유도 하느님을 만나 참 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모든 성인들은 물론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음은 바로 하느님의 존재 증명입니다. 참 행복도 하느님께 있음을 시편 저자는 고백합니다. 시편 모두가 하느님 체험의 고백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 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역시 실감나는 하느님 체험의 고백입니다. 바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참 잘 드러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분은 바로 이런 하느님입니다. 키루스를 임금으로 세우신 하느님의 자기 고백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신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어 만드신 분, 그분께서 그것을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그것을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 이스라엘은 모든 후손들은 주님 안에서 승리와 영예를 얻으리라.”
후렴처럼 끊임없이 반복되는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라는 하느님의 자기고백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우리 인간의 평생공부가 하느님 공부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인 나를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은 하느님을 모르는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무지에 눈먼 사람, 바로 인간에 대한 정의같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을 찾는 하느님, 바로 이게 답이자 복음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셨기에 비로소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하느님입니다. 바로 이를 요약한 제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가도가도 멀기만 하다
아예 고요한 호수가 되어 하늘을 담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이런 하느님을 만납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신 겸손한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을 통해 당신을 궁금해 하는 요한은 물론 우리에게 자신의 신원을 알립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않는 이는 행복하다.”
바로 인간의 궁극의 치유와 구원은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음을 봅니다. 마지막 말마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말씀이 화두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사람을 찾아 오신 하느님’이 예수님 당신임을 깨닫는 이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비중의 신비가 ‘사람을 찾아 오신 하느님’, ‘사람이 되신 하느님’인 강생의 신비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대로 하느님과의 만남이 됩니다. 강생의 신비에 감격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고백입니다.
“그처럼 크신 하느님이, 그처럼 작은 아기가 되었다니!(So great a God, so tiny an infant!)”
바로 이런 주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은총의 대림시기입니다. “저절로 오소서, 주 하느님”, “오소서, 주 예수님!”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찾아 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대림이자 성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선물하십니다. 대림시기는 물론 매일 미사 은총을 상징하는 화답송 후렴, 이사야서 말씀입니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이사45,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