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8.주님 공현 후 대축일 후 토요일 1요한5,14-21 요한3,22-30
갈망(渴望;desire)의 사람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갈망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갈망의 사람, 수도자는 물론 인간의 정의입니다. 시편 63장 2절,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갈망의 인간에 대한 정의입니다. 예전 '내 수도생활관'이란 글에서도 갈망에 대해 강조한 부분이 있어 나눕니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어 수도자다. 비단 수도자들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찾는 갈망은 영성생활의 시발점이자 원동력이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사라지면 영성생활은 끝이다. 그리하여 수도자를 갈망의 사람이라 부른다. 하느님을 찾는 갈망이 있을 때 저절로 깨어 있게 되고 기도하게 된다. 여기서 마음의 눈이 열려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난다. 그러니 갈망-깨어 있음-기도-개안-마음의 순수-주님과의 만남이 일련의 연쇠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엊그제 1월6일 교황님의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감동했습니다. 갈망의 동방박사들을 통해 갈망이 우리의 영성생활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설파한 불후의 명강론이었습니다. 길다 싶지만 일부 많은 부분을 인용하여 나누고 싶습니다.
-“갈망의 능력이다.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타오르고 있는 불을 연소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갈망은 우리를 직접적인 것, 보이는 것들 넘어 영적 현실을 보도록 우리를 내모는 것을 뜻한다. 갈망한다는 것은 우리를 초월하는 신비로서의 삶을 포옹하는 것을 뜻한다. 삶은 우리의 여기 지금의 삶보다 더 큰 무엇인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색깔로 채워지기를 부르짖는 빈 화판과 같다. 위대한 화가, 빈첸트 반 고흐는 언젠가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나를 한밤중 뛰쳐 나가 별들을 그리게 했다.’고 말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다. 동방박사들처럼 별들을 향하도록 방향지워진 반짝이는 갈망이다. 과장할 것 없이 ‘우리는 갈망하는 정도만큼의 존재(we are what we desire)’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는 것, 관습의 장벽을 넘어 우리의 삶을 앞으로 치닫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갈망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의 전 삶이 갈망의 훈련이다.’라고 말했다.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그러하다.
믿음의 위기는 하느님을 향한 갈망의 소멸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지상의 현실에만 골몰하다보니 하늘을,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것을 잊었다. 위대한 것들에 대한 갈망은 증발되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욕구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는 공동체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은 닫혀진 공동체에서 텅 빈 공허를 느낄 뿐이다. 실로 갈망의 결핍은 다만 슬픔과 무관심의 개인이나 공동체로 인도할 뿐이다. 믿음은 갈망에 불을 붙일 것을 필요로 한다. 그래야 늘 새로운 믿음일 수 있다. 내 마음은 하느님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고 있느가? 혹은 실망으로 꺼져 가고 있는가? 바로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오늘이 ‘갈망의 학교’(school of desire)이자 우리의 갈망을 키워야 할 날이요, 날마다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 나가야 한다. 갈망은 우리를 경배에로 흠숭에로 인도하고 흠숭은 우리의 갈망을 새롭게 한다. 하느님 향한 갈망은 우리가 그분의 현존 안에 있을 때만 자랄 수 있다. 예수님만이 욕구의 독재로부터 우리의 갈망을 치유한다. 실로 우리의 갈망이 욕구와 일치될 때 우리 마음은 병들게 된다.
한편 하느님은 우리의 갈망을 승화시키시며 이기심으로부터 그들을 정화하시고 치유하신다. 그래서 흠숭을, 침묵의 흠숭 기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흠숭을 잊지 않도록 하자. 캄캄한 밤일지라도 계속 빛나는 주님의 별이다. 그분을 향한 여정에 오르자. 동방박사들처럼 눈을 들어 우리 마음 속의 갈망의 소리를 듣도록 하자, 하느님께서 우리 위에 빛나게 만든 별을 따라 가자. 하느님의 놀라움에 활짝 열도록 하고 쉼없는 탐구자들이 되자. 그리고 우리 ‘꿈꾸고, 찾고, 흠숭하는’(dream, seek, adore) 사람이 되도록 하자.”-
내용이 너무 좋아 많이 생략하면서 거친대로 옮겨 봤습니다. 바로 이런 갈망의 모범이 제1독서의 사도 요한이요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갈망할 때 아드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체험입니다. 다음 ‘갈망의 사도’ 요한의 체험적 고백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말 그대로 갈망의 은총입니다. 갈망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를, 아드님의 신비를 체험한 사랑의 신비가, 갈망의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1서가 오늘로서 끝납니다. 마지막 말마디, “자녀 여러분, 우상을 조심하십시오.” 큰 울림을 줍니다. 당시의 영지주의의 이단을 지칭하지만 현대판 우상들은 득실득실 합니다. 우상들과 악마들로 가득한 세상이기에 죄도 병도 많은 세상입니다. 참으로 끊임없이 하느님을 갈망할 때 저절로 이런 우상들이나 악마들로부터 이탈하여 초연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갈망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은 세례자 요한은 질투심에 불타는 제자들과 달리 예수님의 정체를 꿰뚫어 보며 겸손히 자신의 신원을 파악하며 제자들을 진정시킵니다. 자신을 그리스도에 앞서 파견된 사람, 또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친구로 자신의 신원을 인지합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갈망의 은총, 갈망의 체험, 갈망의 기쁨, 갈망의 충만, 갈망의 겸손입니다. 마침내 갈망을 통해 주님을 체험함으로 아드님과 자기의 관계를 깨달은 세례자 요한이요, 우리에게도 그대로 해당되는 오늘 복음의 핵심적 진리입니다. 바로 그리스도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질 때 비로소 텅 빈 충만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영적 여정은 그분은 커지시고 나는 작아져가는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나는 사라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되신 그분 안에서 참나를 발견해가는 영적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점차 커져가고 나는 점차 작아져 갈 때 충만한 기쁨에 참 나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하느님과 일치를 향한 갈망의 표현인 ‘2022년 새해 소원’이란 자작 헌시 기도문중 다시 일부를 인용함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오소서,
주 하느님!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의 믿음이
당신의 희망이
당신의 사랑이
당신의 신망애信望愛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진리가
당신의 선이
당신의 아름다움이
당신의 진선미眞善美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되게 하소서
당신만 남고
나는 온전히 사라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하느님이, 당신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이
마리아 성모님이
성요한 세례자가
성요한 시도가
바로 그러하였나이다
내가
하느님이 될 때
전인적 치유가
온전한 참나眞我의 구원이 이뤄지겠나이다
내 소원
단 하나 이것뿐이옵니다
오, 주 하느님!
일편단심一片丹心 당신만을 사랑하나이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를 받으시옵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