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처럼 삽시다-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2022.1.14.연중 제1주간 금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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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4.연중 제1주간 금요일                                                        1사무8,4-7.10-22ㄱ 마르2,1-12

 

 

예수님처럼 삽시다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루하루가 새롭고 좋고 아름답고 고맙습니다. 날마다 잠깨어 문밖을 나서면 맨먼져 바라보는 것이 언제나 거기 그 자리 밤하늘의 북두칠성과 수도원 배경의 불암산입니다. 겨울 날씨가 차니 공기도 맑고 하늘의 별들도 초롱초롱 맑고 밝습니다. 아주 예전 ‘소망所望’이란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차가운 날씨

청정淸淨해서 좋다

맑고 깨끗하다

 

살짝 덮인

회새 구름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빛

온유溫柔해서 좋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청정淸淨과 온유溫柔를 

겸할 수 있다면”-1997.12.2.

 

어제 세상을 떠난 어느 분의 부음을 듣고 저절로 나온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삶의 끈을 놓지 말고 살았어야 하는데. 삶과 죽음이 별 차이가 없어 보이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지 거의 확인이 안되는 존재감이 아주 약해 보였던 참 안타깝게 생각되는 분입니다. 두문불출하기에 살아 계시는 동안 거의 볼 수 없었던 분입니다.

 

반면 삶의 귀감이 되는 노익장老益壯의 두 분 삶의 내용도 잊지 못합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한결같이, 모순적이지만 말그대로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청정과 온유를 겸해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구순 조각가, 최종태 “일할 때는 청년이고, 일 안하면 환자예요.” 조각가의 삶을 산 지 67년째, 평생 사람 조각하며 “아름다움” 고민. “하느님과 노는 게 일하는 것”. 요즘도 하루 10시간씩 작업 몰두.’(가톨릭평화신문2021.12.12.15쪽)

 

참 치열하고 한결같은 삶, 나이를 초월한 영원한 청춘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또 한분의 학자 또한 대동소이입니다. 길다 싶지만 유익하고 사랑이 가득 담긴 미담이기에 인용합니다.

 

“보스코는 보통 새벽 4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 10시간 이상 끈기있게 의자를 덥힌다. 번역을 하거나 글을 쓴다. 그의 직업이 번역작가이다 보니 번역하는 이들의 노고도 알고, 원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본문에 충실하며 그 내용을 성실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는 요즘도 80 노인이 책상 앞에서 한 줄 라틴어 문장을 놓고 반나절을 푹푹거리며 이곳저곳 책들을 뒤지면서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서 안다.

 

동네에 들어서니 리디아 아주마를 비롯하여 동네 아짐들이 약속이나 한 듯 고추대를 지팡이 삼아 마을길을 한 바퀴 돌고 있다. 작년에 상처한 허영감도 모처럼 지팡이를 짚고 산보를 다녀오는 중이다. ‘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는 구호가 문정 마을에도 들어온 것 같다. 내가 기필코 보스코를 산보길에 떠밀며 걷게 하는 까닭도 이 구호 때문이다. 더구나 여든 나이에 하루 10시간 이상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이다.”(휴천재;전순란)

 

참 치열한, 한결같은, 진짜 살아 있는 삶입니다. 옛 사막교부들의 유일한 관심사도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누어 있기 보다는 앉아 있는 것이, 앉아 있기 보다는 서있는 것이, 서있기 보다는 걷는 것이 더욱 살아 있다 생각됩니다. 삶이 무기력해질 때는 벌떡 일어나 하늘 보며 묵주기도를 바치며 걷기를 권합니다.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 합니다. 불면증과 우울증, 치매 예방에는 걷기가 제일이라 합니다.

 

위에 소개한 두 독실한 가톨릭 형제들은 참으로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두고 살아가는 신망애의 노인이 아닌 어른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삽시다-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논쟁이 참 재미있습니다.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리의 갈등처럼 보입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자신들을 통치할 임금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현실주의적 관점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하느님을 대리한 사무엘에게 하느님은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그들은 사실 너를 배척한 것이 아니라 나를 배척하여, 더 이상 나를 자기네 임금으로 삼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어지는 사무엘의 설득은 왕권주의, 국가주의, 병영 군국주의, 제국주의가 얼마나 사람들을 노예화하고 비인간화 하는지 역사를 통해서는 물론 지금도 공감하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성군같은 임금이나 지도자보다는 폭군같은 임금이나 지도자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다스릴 임금의 권한이오. 그는 여러분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자기 병거와 말 다루는 일을 시키고, 병거 앞에서 달리게 할 것이요.”

 

이어지는 사무엘의 설득은 구구절절 공감이 가고 부정적 인류 역사가 이에 대한 생생한 증거가 됩니다. 현실을 택한 결과 산산조각 나는 이상이요 인간의 노예화, 비인간화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모든 민족들처럼, 임금이 우리를 통치하고 우리 앞에 나서서 전쟁을 이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 어려운 과제입니다.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힘없는 정의가, 힘없는 평화가, 힘없는 진리가 때로 탐욕의 힘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체험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막무가내 현실주의적 관점을 주장하며 하느님을 대변한 사무엘의 설득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침내 이들의 승리로 끝납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백성을 이길 수 없는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참으로 성군같은 지도자에 깨어 있는 시민의식의 민주주의 국가가 궁극의 답이겠습니다만 참 힘든 숙제입니다. 여기에 거의 근접하고 있는 나라가 아마도 현재의 독일일 것입니다. 답은 오직 하나!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인 예수님을 공부하고 실천하여 닮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성숙한 분별력의 지혜와 용기와 사랑, 믿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래야 현실과 이상, 명분과 실리의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 동료들의 지극 정성의 형제애의 믿음에 감동하신 예수님은 지체없이 죄의 용서를 통한 영혼의 치유와 더불어 육신의 치유를 명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대로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는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통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중풍병자는 물론 동료들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을 통해 크게 깨닫고 배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을 체험한 모든 사람은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런 예수님같은 성군의 지도자에, 이런 체험의 사람들이라면 참된 민주주의의 실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예수님을 닮아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참된 성숙한 민주주의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참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훈련이, 진리의 지혜의 훈련이 참으로 우리를 현실주의적 이상주의자로 변모시킬 것입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로 다음 화답송 시편이 오늘 강론에 답을 줍니다.

 

“행복하여라, 축제의 기쁨을 아는 백성! 주님, 그들은 당신 얼굴 그 빛 속을 걷나이다. 그들은 날마다 당신 이름으로 기뻐하고, 당신 정의로 힘차게 일어서나이다.”(시편89,16-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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