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그리스도 중심의 삶- 022.1.17.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251-356)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17,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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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7.월요일 성 안토니오 아빠스(251-356) 기념일   

1사무15,16-23 마르2,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그리스도 중심의 삶-

 

 

 

어제 강론을 보강하고 싶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벽이 변하여 문이 되고, 폭풍이 변하여 미풍이 되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주님 영광의 표징이라는 것이며,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이 거룩한 미사시 포도주가 변하여 성혈이 되는 주님 영광의 표징일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잠시 휴게실에 들렸다가 신간 서적을 발견하고 참 반가웠습니다. 새 책을 보면 우선 행복감에 부자가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잠시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으로 존숭하는 세종대왕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1437년 4월 15일 실록의 기사입니다.

 

“세종은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다. 100-200번은 기본이고, 1100번이나 읽은 책도 있다. 실록에 보면, ‘주상께서는 수라를 들때도 반드시 책을 펼쳐 좌우에 놓았고, 밤중에도 그치지 않았다.’ 공부에 관한 한 세종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한가롭게 앉아 있을 때가 있느냐’면서 ‘책을 읽는 것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주간경향;2021.11.22. 51쪽)

 

그러니까 37년전, 1985년 왜관수도원에서 수련받을 때, 수련장 신부님이셨던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님의 참 신선하게 느껴지는 사제서품 50주년 기념 글모음집이었습니다. 참으로 선량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으로 기억하는 어른입니다.

 

“우리 믿음이 든든한 바위 같게 하소서”

 

책 제목도 마음에 와 닿았고 책 서문의 내용도 소박하고 겸손하며 온유한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수도원에 입회한 지가 벌써 60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수도서원한지도 53년이 흘렀고 사제서품 50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동안 ‘수도자로서 또한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하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충실히 답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고, ‘아빠, 아버지’의 크신 배려로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저를 받아들여 이끌어 주신 수도원의 선배님들과 공동체 형제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오래된 옛 글들을 꺼내 보니, 과거의 제가 지금의 저에게 이야기를 건네며 더 열심히 살라고 가르치고 깨우치는 느낌이 듭니다.”

 

절의 두 귀한 보물은 절의 역사가 담신 노승老僧과 노목老木이라 하는 데, 이런 아름다운 수도선배는 수도원의 참 귀한 자산입니다. 참으로 한 평생 성소에 충실했다는 삶 자체가 참 아름답고 귀하게 생각됩니다.

 

오늘은 은수생활의 아버지라 일컫는 사막의 성 대 안토니오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무려 105세 까지 사셨으니 성인들중 아마 가장 장수했던 분일 것입니다. 105세까지 참으로 성소에 한결같이 충실했던 분으로 네가지 예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안토니오 아빠스의 회심 과정에서 말씀과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말씀은 그리스도의 현존이요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들은 것입니다. 말씀이 회심을 일으키고 기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중심의 믿음도 날로 굳건해지니, 말씀-회개-기도-믿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끊임없는 말씀과 회개 및 기도의 수행이 든든한 바위같은 믿음이 되게 합니다.

 

“네가 완전히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태19,21)

 

바로 이 복음 말씀이 안토니오의 결정적 회심과 더불어 그를 사막의 수도생활로 이끌었습니다. 성인의 마지막 유언도 인상적입니다. 임종을 예견한 성인은 지팡이는 성 마카리오에게 한 개의 양피 망토는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또 한 개의 양피는 제자 세라피온에게 주고 자신의 시신은 비석 없는 비밀묘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얼마나 무소유의 본질적 가난한 삶을 살았는지 그의 성소 말씀이 평생 성인께 영향을 미쳤음을 봅니다.

 

성인은 언젠가 온 세상이 덫들과 함정으로 가득 한 꿈을 꾸었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오, 좋으신 주님, 누가 이러한 덫들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애원하듯 물었을 때 들려온 주님의 답변입니다. “겸손은 더없이 그것들을 피할 것이다.” 새삼 모든 덕의 어머니라 칭하는 겸손이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무지에서 벗어나 자기를 아는 자가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이렇게 겸손하고 지혜로워야 끝까지 성소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안토니오가 악마와 치열하게 싸운 후 원망하듯이 주님께 악마들이 공격할 때 하느님은 어디 계셨나 추궁하듯 묻자 주님은 대답합니다. “나는 거기에서 너와 함께 있었으며, 네가 사나이답게 잘 싸우며 견뎠으므로, 나는 너의 이름이 온 세상에 두루 퍼지도록 할 것이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늘 나를 살펴보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에 이어 제1독서 사무엘 상권의 주인공은 사울입니다. 사울의 불행의 단초는 주님의 말씀에 충실치 못했음에 기인함을 봅니다. 이 또한 하느님 탓이 아닌 자업자득입니다. 순간의 탐욕에 빠져 주님의 말씀을 잊었고 구구하게 합리화 합니다만 이미 하느님의 마음은 그에게서 떠났고 성소에 실패자가 되고 맙니다. 바로 다음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말씀 중심의 삶, 그리스도 중심의 삶에 항구할 것을 가르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1사무15,22)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복음의 이해에도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참으로 본질적인 분별의 잣대는 단식의 횟수가 아니라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단식을 잣대로 함은 주객전도主客顚倒, 본말정도本末顚倒의 어리석음을 반영합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가 있으며, 지금은 단식의 때가 아닌 주님이신 당신과 함께 축제인생을 즐겨야 할 때라 말씀하십니다.

 

불가에서 인생을 고해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교회의 믿는 이들은 고해인생을 살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는 동안 내내 축제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깨어 주님과 함께 그리스도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 때 축제인생이 될 것입니다. 어떻게 축제인생을 살 수 있겠는지요? 복음의 마지막 말씀이 답이자 결론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래야 늘 새 하늘에 새 땅의 삶이 겠습니다. 바꿔야 할 것은 외적 환경이 아니라 마음을 늘 새롭게 하여 새 부대로 만드는 일이 겠습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말씀-회개-기도-믿음”의 일련의 여정을 통해 늘 새 부대의 마음으로 만드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이래야 늘 새 포도주의 현실을 새 마음 부대에 담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년이 될수록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는 데, 지갑은 물론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을 수 있도록 마음의 눈, 마음의 귀도 늘 열려 있어야 함을 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게  해주시고, ‘새 부대의 마음 안에 새 포도주의 현실’을 담게 해 주시며,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살게 해주십니다.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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