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금요일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291-304) 기념일
1사무24,3,21 마르3,13-19
성소聖召의 소중함
-성소는 은총의 선물膳物이자 과제課題다-
오늘은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의 귀한 선물인 성인들이 참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주님께 부름 받은 성소자인 우리의 신원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좌표와도 같은 희망의 징표, 구원의 징표, 회개의 징표가 되는 성인들입니다. ‘아, 이렇게 살아야 하겠구나!’ 깨달음과 더불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성인들입니다.
성녀 아녜스는 291년에 태어나 304년에 순교하였으니 고작 13세의 참 짧은 생애였습니다. 아녜스는 그리스어로 ‘순결’ 또는 ‘양’을 뜻합니다. 로마제국의 어는 부유한 집안 출신인 성녀는 이미 13살에 하느님께 자기의 순결을 지키기로 서원합니다. 그러나 구혼에 실패한 청혼자의 고발로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체포된 성녀는 마침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참수형을 받아 순교의 월계관을 씁니다. 이후 성녀는 순결과 순수함을 추구하는 동정녀들의 수호성인이 됩니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성녀의 유언과도 같은 성무일도중 1.즈가리야의 노래 후렴과 2.마리아의 노래 후렴이 참 감동스럽습니다.
1.“보라,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것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한 분을 만났도다.”
2.‘성녀 아녜스는 두 팔을 벌리고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갈망하던 거룩하신 성부여! 당신께 나아 가나이다.”하고 기도하였도다.'
새삼 우리 정 아브라함 수사의 1.종신 서원 상본과 2.사제서품 상본에 나온 기발한 착상의 성구에 감탄하게 됩니다. 세상에 이보다 성소를 새롭게 점검케 할 수 있는 성구도 없을 듯 합니다.
1.“아브라함아!”(창세22,1)
2.“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22,11)
비단 아브라함뿐 아니라 각자 주님께서 자기를 부르셨다 생각하고 자기 세례명을 넣어 불러 봐도 좋을 것입니다. 마침 피정중인 어느 수녀님의 문자 메시지가 생각났고 이에 대한 제 답신이 생각납니다.
‘이번 피정 제목은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로 하려고 한답니다.’
“피정 제목 좋습니다. 하느님 불러 주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것이 평범하지만 최상의 길이지요!”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만일 우리가 주님께 부름 받지 않았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도저히 상상이 안될 것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삶에 가정법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의 부르심에 의해 응답하여 이렇게 은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고마운 하느님 부르심의 성소인지 깨닫습니다.
유명한 합리주의의 철학자 데칼트는 말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나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은 말합니다. “나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참으로 공감이 가는 성소의 본질에 대한 언명입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음으로 비로소 존재감 충만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새삼 우리의 성소가 얼마나 귀한 은총의 선물인지 깨닫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강론 제목은 “성소의 소중함-성소는 은총의 선물이자 평생 과제다-”로 정했습니다. 마침 어제 자매와의 면담중 장부가 냉담중이지만 그 갈망을 해소하려 타종교의 스승들에게 진리를 찾고 있다는 말을 듣고 드린 조언이 생각납니다.
“왜 여기 샘솟은 우물인 주님을 놔두고 밖에서 물을 퍼다 마십니까? 여전히 목마를 뿐입니다. 기도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 많이 들어도 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적 갈증은 결코 해갈되지 않습니다. 매일 기도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생명수를 마셔야 비로소 해갈되는 영혼입니다. 한두번의 만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그날까지 매일 주님을 만나 생명수를 마셔야 삽니다.”
요지의 권고였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귀한 선물이 각자의 성소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두제자를 사도로 부르신 경우와 똑같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호숫가에서 가르치셨고 기도하실 때나 제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하실 때에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 묘사가 한폭의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시어,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사도라 이름하였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즉시 기꺼운 마음으로 응답하는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성소의 신비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서 원하셔서 부르셨음이 분명합니다. 성소의 두 측면이 드러나니 즉 제자이자 사도로서의 신원입니다. 주님과 함께 지내며 주님께 배워 닮아야 하는 관상적 측면의 ‘제자직’과 세상에 파견되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해야 하는 활동적 측면의 ‘사도직’입니다.
안으로는 관상의 제자요 밖으로는 활동의 사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두 측면의 조화가 균형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에 이은 파견이 이런 진리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미사중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과 일치의 관상후 세상에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성소는 순전히 주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저절로 선물로써 끝나는, 완성되는 성소가 아닙니다. 성소 또한 과정이자 여정입니다. 평생 성소의 여정중에 있는 우리들이요 그리하여 날마다 새롭게 주님을 만나 성소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죽는 그날까지 부단히 자기 성소를 깨어 돌보고 가꿔야하는 과제는 순전히 우리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우리의 과제 수행의 분투의 노력과 더불어 성장 성숙해가는 우리의 성소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 훈련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유일무이한 각자의 귀한 성소입니다. 참으로 우리 하나하나가 존엄한 품위의 인간임을 실증하는 성소입니다.
참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소자로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내 성소가 귀하듯이 형제들의 성소도 귀합니다. 참으로 서로 돌보고 가꾸는 섬김의 사랑이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바로 인간 존엄성의 근거가 하느님께서 불러 주신 우리의 성소입니다. 결코 비교하거나 판단할 수 없는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참으로 신비로운 각자의 성소입니다.
그러니 부단히 물어야 할 내 성소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제대로 참으로 진짜 살고 있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등 끊임없이 날마다 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울왕의 성소를 아끼는 다윗의 인품이 참 감동적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동굴에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임금님을 죽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그분은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니 나의 주군에게 결코 손을 대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임금님의 목숨을 살려 드렸습니다.”
이어지는 구구절절 다윗의 진정성 넘치는 진실하고 간절한 고백이 사울을 감동시켰고 이에 대한 사울의 솔직하고 순수한 반응도 감동적입니다.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날 것이다.”
사울의 성소를 아끼는 다윗의 관대한 사랑이 사울을 감동시켜 회개에로 이끌었음을 봅니다. 이후 또 다윗을 추격하는 변덕스럽고 불안한 사울이지만, 다윗은 한결같이 사울의 성소를 존중했고 자신의 성소에 충실했습니다. 참으로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또 제1독서의 다윗을 통해 우리 성소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우리의 귀한 성소자의 신원을 새롭게 깨닫게 해 주시며, ‘성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