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중심의 삶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의 삶-2022.1.24.월요일 성 프린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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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4.월요일 성 프린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1567-1622) 기념일

2사무5,1-7.10 마르3,22-30

 

 

하느님 중심의 삶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의 삶-

 

 

어제 어느 착한 자매님이 투명한 비닐 봉지에 담긴 예쁜 귤을 책상에 놓으면서 한 말이 강론 쓰는 새벽 지금 새삼스런 깨달음처럼 마음에 와닿습니다.

 

“꽃을 보듯이 열매를 보면서 하나씩 잡수세요!”

 

꽃꽂이를 대체한 주황색 고운 귤 열매들이 흡사 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봄의 꽃들도 아름답고 향기롭지만 가을 열매들은 봄꽃 이상으로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가을 열매 잘 익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는 배밭의 가을 배열매들을 보면 실감합니다. 

 

꽃같은 젊음보다 열매처럼 잘 익어가는 노년의 아름다움과 향기는 더 깊고 편안하고 넉넉하고 그윽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며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바로 평범한 일상에서 한결같이 이렇게 사는 이들이 성인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어제 끝기도때 찬미가 두 절이 새삼 아름답다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잠을 자도 주님과 함께/꿈에도 당신만을 뵙게 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새는날/밝아올제 찬미하리다”

 

“몸과맘 튼튼하게 생명주시고/우리의 몹쓸열기 식혀주소서

밤깊어 무섭도록 캄캄한속을/눈부신 당신 빛이 비춰주소서”

 

바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한 이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마음을 다해 바치는 이런 기도가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학작 기념일입니다.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준 영성대가입니다. 그는 종교개혁자에 대항하는 지도자들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으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미망인이었던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을 만나 그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두분은 교회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영적 우정의 도반으로 인정됩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과 함께 기존 수도회의 육체적 엄격함을 견디기 어려운 젊은 여성들이나 미망인들을 위한 ‘성 마리아 방문 수도회’를 설립합니다.

 

성인은 프랑스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리옹에 있는 성 마리아 방문 수도원의 작은 방에 머무르던중 뇌일혈로 병자성사와 고해성사후 1622년 12월28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예수, 내 하느님 나의 전부여!” 임종 기도후 만55세로 선종합니다. 성인의 무수한 저술중에도 특히 ‘신심생활입문’과 ‘신애론’이 유명합니다. 

 

성인은 그레고리오 교황에 의해 1662년 1월8일 시복된후 1665년 11월19일 시성되었고, 1877년 11월16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선포되었으며, 1923년에는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작가와 언론인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사후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듯한 대 영성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성인입니다.

 

성인은 독창적 방식으로 교회의 정통적 영성을 가르치고 생활하며 방향을 제시하였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성성聖性에서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습니다. ‘성인으로 불린 이는 일부 소수의 특전 받은 사람이 아니고 각 생활 상태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중요한 교의는 약 400년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정된 진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나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자가 성인입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런 성인들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의 문제점이 환히 드러납니다. 복음의 상황이나 오늘의 현실이나 흡사합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었을 때 참으로 혼란하고 혼돈스런 세상이 됩니다. 하느님 중심의 제자리에 온갖 우상이나 더러운 영들이 자리잡고 있을 때 마귀들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왜곡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아 사탄이 쫓아낼 수 없음을, 즉 영악한 사탄이 분열을 자초하는 일이 없음을 예로 들면서 사탄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당신이심을 밝힙니다. 하느님의 힘을 지닌 예수님만이 사탄을 제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힘센 자가 자리한 중심 자리에 그 보다 힘센 분이신 주님을 모실 때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 마음의 중심 자리에 주님을 모시고 내부를 깨끗이 정리하고 살 때 비로소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하느님의 영에 의한 활동을 더러운 영이 들렸다 곡해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바로 이런 율법학자 같은 이들이 성령을 모독하는 악마같은 자들입니다. 생각없이, 영혼없이, 하느님 중심없이 살다 보면 누구나 더러운 영이 들릴 가능성이 농후한 참 위태한 사람들입니다. 바로 오늘날의 혼란상이 이를 입증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들이 득실득실한 세상같습니다. 얼마전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머리는 좋은데 마음 나쁘게 쓰는 이들을 보면 참 난감합니다.”

“머리는 좋은데 마음은 나쁘게 쓰는 이들, 그대로 악마들이네요!”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진실하고 정직한 이들이 참으로 그립고, 고맙고, 소중한 시대입니다. 바로 이런 삶의 모범이 산전수전 역경을 거치면서 믿음으로 승리의 삶을 살아 온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주인공 다윗입니다. 다음 묘사가 다윗의 성공과 그 비결을 알려줍니다.

 

“다윗은 서른 살에 임금이 되어 마흔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헤브론에서 일곱해 여섯달 동안 유다를 다스린 다음,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행 동안 온 이스라엘을 다스렸다. 다윗은 세력이 점점 커졌다.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다윗 성공의 비결은 바로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임을 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사는 자를 누가 대적할 수 있을런지요. 새삼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성인답게 사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시며 시편 화답송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진실 내 자애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시편89,25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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