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나라 -오늘 지금 여기, 순리順理에 따른 삶-2022.1.28.금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1225-1274) 기념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Jan 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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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8.금요일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1225-1274) 기념일

2사무11.1-4ㄱㄷ.5-10ㄱ.13-17 마르4,26-34

 

 

하느님의 나라

-오늘 지금 여기, 순리順理에 따른 삶-

 

 

“삶은 선택이다.”, 요즘 제가 자주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물론 좋은 선택을 위해서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간절하고 항구한 열망이자 꿈이자 비전은, 희망은 하느님의 나라였습니다. 오늘의 저절로 자라는 씨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둘 다 하느님의 나라 비유입니다. 

 

언젠가 죽어서 맛보고 체험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선택하여 맛보고 체험해야 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 역시 선택입니다. 얼마전 실패인생이라 자인하는 분에게 실패 역시 선택이니 오늘부터 성공을 선택하여 살라 조언한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가톨릭 교회의 최대의 철학자라 공인하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지금부터 약1200년전 고작 49세로 끝난 생애이지만 참으로 전무후무의 불가사의의 천재 신학자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신학자였지만 겸손하고 성실하며 따뜻한 사목자였고 도미니꼬회 수도자였습니다.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 위로와 힘을 주는 성인으로 흡사 지금도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참 삶의 좌표를 보여 주는, 예수님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여러 일화들은 늘 반복하여 들어도 새롭고 영감을 줍니다. 아무리 자랑해도 싫증을 못 느끼는 몇 일화를 소개합니다.

 

작은 경당에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주고 받은 대화를 열린 문틈으로 동료 수사가 엿들었다는 전설같은 일화입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다.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느냐?” 물으셨을 때, “주님, 저는 당신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답변했다는 것입니다. 주님 하나 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하다는 답변이겠습니다.

 

성 토마스의 스승이었던 성 대 알베르투스는 “이 말없는 황소는 그의 부르짖음으로 전 세계를 가득 채울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또 성인은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우스 축일 미사중 강렬한 하느님 신비 체험을 한 후부터 돌연 집필 작업을 중단하고 다음 같은 사유를 말합니다. “주님의 발현시에 형언키 어려운 신비를 보았다. 그동안 내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은 이 신비에 비하면 지푸라기와 같다” 결국 신학대전은 미완의 대작으로 남게 됩니다.

 

성인의 마지막 임종어는 “내 벗인 죽음이여, 어서 오게나.---나는 기다리고 있었네.” 였습니다. 성인의 시성 심사와 관련하여 성인의 격에 어울릴만한 기적이 없다는 지적에 요한 22세는 “그가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그만큼의 기적들을 행한 것이다.”라는 명답으로 말문을 막았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성인은 1880년 교황 레오 13세 교황에 의하여 모든 대학교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며, 성인학자에게 붙여진 칭호는 “보편적 박사(Doctor Communis)” 또는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였습니다. 성인의 하느님 향한 열망을 표현한 다음 그의 기도도 감동적입니다.

 

“오 주 하느님 저에게 허락해 주십시오. 당신을 알 수 있는 정신을, 당신을 찾을수 있는 마음을, 당신을 발견할 수 있는 지혜를,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삶을, 당신을 기다리는데 신뢰 가득한 항구함을 주소서. 그리고 마침내 당신만을 껴안는 희망을 주소서.”

 

참으로 이외에도 무수한 전설같은 일화가 전해오는 말그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았던 성인입니다. 성인들의 색깔이 참 다양합니다. 우리 역시 참나의 고유한 성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를 살라고 불림 받고 있습니다. 기억, 기념하라고만 있는 성인축일이 아니라 우리도 성인으로 살라고 분발을 촉구하는 성인축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성 다윗의 행태가 충격입니다. 어제 멋진 감사기도를 드린 성 다윗이 오늘 유혹에 빠져 악마가 되어 밧세바를 범한 후 그의 남편 우리야를 사지에 넣어 전사하게 함으로 참으로 천인공노할 대죄를, 완전 범죄를 저지릅니다. 내일 독서에서 나탄 예언자에게 탄로날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 범죄는 불가능함을 봅니다. 

 

노자 73장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이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늘의 그물은 괴장히 넓어서 눈은 성기지만 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앙화를 내리는 일은 조금도 빠뜨리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의 그물을, 하느님의 눈을 벗어난 완전 범죄는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이 결정적 실수는 잠시 방심한 탓에 유혹에 빠져 하느님 나라를 잊었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미풍의 현실은 이제 끝나고 거센 태풍의 고단한 삶을 살게 될 성 다윗입니다. 새삼 하느님의 나라도 선택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여 살아갈 때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는 비밀을 알려줍니다. 두 하느님 나라 비유가 대동소이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잘 들여다 보라는 것입니다. 무리하지 말고 순리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느님의 섭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지 말고 잘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두 대 원칙이 적용됨을 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건드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냥 그대로 놔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관심의 방치나 방관이 아니라 깨어 하느님의 나라가 잘 펼쳐지도록 보살피고 가꾸는 섬세한 협조의 노력을 뜻합니다. 하느님이든 사람이든 무분별하게 주제넘게 간섭할 때에는 십중팔구 “너가 뭔데?” 또는 “너나 잘해!” 두 말마디를 듣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서서히, 은밀히 진행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에 우리가 할 일은 조급하게 서두르는 일 없이, 깨어 한없이 견디고 기다리는 겸손과 인내의 사랑이, 관상적 자세가 절대적임을 깨닫습니다. 한 마디로 100% 하느님 은총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노력의 손에 달린 듯이 일하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실현에 맞갖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입니다. 이런 삶의 자세가 하느님은 물론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선택은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도 선택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처럼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택하여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께 잘 협조해 드리며 순리에 따라 겸손하고 성실히 하느님 나라를 잘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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