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10.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480-547) 축일
호세2,16.17ㄷㄹ.21-22 루카10,38-42
환대의 사랑
-정주, 환대, 경청, 우정, 치유-
오늘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는 성녀 스콜라 스티카 동정 축일을 지냅니다. 참 아름다운 축일에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환대, 아름다운 영적 우정입니다. 베네딕도와 스콜라 스티카 오누이가 그렇고, 오늘 복음의 예수님과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그렇습니다. 어제는 수십년 동안 맞이하는 축일인데 새삼스런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기막힌 하느님 섭리임을 깨닫습니다. 오빠 베네딕도와 스콜라스티카 오누이 쌍둥이의 생몰연대(480-547)가 같다는 사실입니다. 쌍둥이 남매니 태어난 해는 물론이지만, 죽은 해도 같다는 사실이 참 신비로웠습니다. 이런 경우는 토마스 머튼의 수도원 입회 날짜(1942.12.10)와 방콕에서의 선풍기 감전사로 죽은 날짜(1968.12.10)와 일치함에서 느낀 신비로운 그분 섭리의 손길을 보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레고리오 대 교황의 <베네딕도 전기> 33장과 34장은 두 남매간의 아름다운 환대와 경청, 영적 우정이 참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동생을 환대한 정주의 수도승이자 오라버니인 성 베네딕도는 사랑하는 여동생 성 스콜라스티카의 간절한 기도의 응답으로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귀원한 것이 좌절당한 채 환대의 장소에서 밤새껏 누이와 영적대화를 나누며 영적우정을 깊이합니다.
바로 33장의 내용이며, 34장은 이 아름답고 복된 만남후 3일만에 세상을 떠난 스콜라스티카요, 같은 해 성 베네딕도 아빠스도 귀천했다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입니다. 베네딕도 전기 34장의 아름다운 내용을 인용합니다.
‘삼일 후에 성인께서 수도원에 계셨는데, 눈을 들어 하늘을 보니 누이의 영혼이 육신에서 나와 비둘기 형상으로 하늘에 신비롭게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분은 그처럼 영광스런 누이의 모습에 기뻐하시면서, 찬송과 찬미가로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고 형제들에게 누이의 임종을 알려 주었다.
그분은 즉시 형제들을 보내어 누이의 시신을 수도원으로 모셔와서 당신 자신을 위해 마련해 둔 무덤에 안장하게 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두 분의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늘 하나였던 것처럼 그들의 육신도 무덤에서까지 갈라져 있지 않았다.‘(베전34,1-2).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화인지요! 이를 요약한 오늘 저녁 성무일도 찬미가나 후렴 및 응송, 그리고 마리아의 후렴도 아름답고, 축일 미사때 불렀던 부속가의 가사와 곡도 아름다운 감동입니다. 전문 가사를 인용합니다. 원래의 라틴어를 우리 말로 옮긴 것입니다. 오늘은 틈나는 대로 불러볼 생각입니다.
“영원 평화 안식이 성녀 스콜라 스티카에 담뿍 안겨졌도다.
휴식소에 들어가 사랑하던 정배와 포근한 정 누리니,
사랑하는 그이를 얼마나 그리워해 열심히 찾았는고.
눈물로써 하늘을 움직여 비오게 해, 오빠 맘 누그렸네.
숭고하신 말씀이 천당복락에 대한 성 베네딕도 말씀,
갈망과 동경이며 동신이신 정배인 그를 일깨우셨네.
아름다운 사람아, 사랑하는 신부여, 면류관을 받으라.
백합중에서 살며 가득히 찬 행복속에 맘껏 취하러
강가에서 나아와 천당궁궐로 가는 동녀중의 비둘기
아름다운 향기로 우리 인도하여 영생 얻게 하소서.”
얼마나 감미로운 사랑과 아름다움의 부속가인지요! 새삼 축제같은 삶에 축제같은 죽음임을, 또 죽음은 천상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임을 깨닫습니다. 그곳에서 정주의 하느님은 지상생활을 아름답게 끝내고 귀가하는 성인성녀들인 우리를 사랑으로 환대하실 것입니다.
환대의 사랑이요 환대의 영성입니다. 정주 수도승 생활을 하는 우리 베네딕도회의 특징적 요소가 환대입니다. 정주와 환대가 한 셋트입니다. 정주의 환대요 사랑의 환대를 통한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그러니 "정주-환대-경청-우정-치유의 구원"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이런 영적 진리는 오늘 복음에서도 그대로 입증됩니다.
여기 요셉 수도원처럼 환대의 집인 나자로-마르타-마리아 삼남매가 정주하는 베타니아 집입니다. 이 환대의 집은 늘 예수님께 활짝 열려 있어 아마 예수님께서도 수시로 찾았던 듯 합니다. 환대는 새삼스런 덕목이 아니라 옛 우리 조상들에게 일상화 되었던 덕목이었습니다. 환대의 집 베타니아 집처럼 전통 한옥집에는 반드시 환대의 방, 사랑방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파트 집들이 결여하고 있는 손님 접대의 환대의 방, 사랑방입니다. 위키백과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한국식 전통 가옥에 존재하는 손님방의 이름이 사랑방이다. 바깥 사람이 거처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한옥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주거는 폐쇄적 구조가 아니기에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마당과 생활공간 사이에서 시야에 걸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때문에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 및 대외적 공간과 사적 공간인 안방을 분리하는 사랑채가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환대의 사람, 마리아와 마르타의 환대의 양식이 참 대조적입니다. 우리는 마리아에게서 참 환대의 모범을 봅니다. 우선 주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에 경청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마리아입니다. 둘간의 영적우정도 무르익어 갔을 것이며 마리아는 내적치유의 구원도 체험했을 것입니다.
새삼 마리아의 주님 환대와 경청이 우리 수도자들의 성전에서의 공동전례기도 시간에도 그대로 실현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좁은 마음에 반발하는 마르타에 대한 애정 가득 담긴 주님의 충언 말씀도 활동주의에 중독된 이들을 깨우쳐 주는 죽비같은 말씀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말씀의 경청을 통한 주님 환대의 선택이 우선임을 일깨우며 마리아의 손을 들어 줍니다. 이건 마리아에 대한 편애가 아니라 올바른 분별의 지혜입니다. 이래서 미사의 구조도 경청의 말씀전례에 이어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나눠 모시는 성찬전례가 뒤를 잇습니다. 환대의 하느님이요 환대의 모범인 하느님입니다. 오늘 호세아서는 광야 여정중의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여기 광야의 ‘아내’가 상징하는 바 이스라엘 백성이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광야 여정중의 우리들입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리라.”
우리를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로서 환대해 주시는 주님 환대의 사랑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의 우리 환대와 우리의 주님 환대가 만나는 복된 은총의 미사시간입니다. 수도원의 정주와 환대의 관계가 아름답게 묘사된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중 한 연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샘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