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재의 수요일 요엘2,12-18 2코린5,20-6,2 마태6,1-6.16-18
은혜로운 영적훈련 사순시기
-회개, 기도, 단식, 자선-
올해같이 사순시기가 절박하게 기다려지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광야의 외딴곳 사순시기에 고요히 머물며 쉬고 싶은 알게 모르게 지친 영혼의 갈망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 광야여정중 영육이 고단한 이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사순시기는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하느님의 축복 선물인지요!
하느님의 사랑은 어김없이 교회의 사순 전례를 통해 표현됩니다. 기후위기,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불평등의 심화, 대량소비, 불타고 있는 공동의 집인 지구, 나라의 명운命運이 달린 3월9일 대선 걱정에, 참으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맞이하는 오늘부터의 은총의 영적훈련 사순시기입니다. 3월 성 요셉 성월이 함께 함이 커다란 위로와 힘이 됩니다.
아무도 죽음을, 세월을 이길 수 없습니다. 때가 되면 늙게 되고 죽는 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런 순리이며 섭리입니다. 참으로 강론 주제로 많이도 사용됐던 “인생 여정”이란 말마디입니다. 요즘 세상을 떠나는 지인들이나 유명인사들을 보면 나이 90을 넘는 일이 드뭅니다. 치매나 노환등으로 힘겨운 노년을 맞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살아 온 날들보다 오늘부터 살아갈 하루하루의 날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성규4,47)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성 베네딕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 또한 회개한 영혼의 과거는 묻지 않습니다. 불문에 붙입니다. 하루하루 선물의 날들을 깨어 감사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면 됩니다. 죽음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됩니다. 산대로 죽습니다. 저의 살 날은 헤아려 보니 90세 전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 간다 생각하니 15년 안팎입니다.
지난 2월26일 89세로 타계한 영원한 자유인이자 이 시대의 지성인 개신교 신자 이어령 선생의 아름다운 죽음도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길다 싶지만 사순시기 첫날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에 그대로 인용하고 싶습니다. 이어령 선생의 호출을 받고 찾았던 김지수 문화전문기자의 글입니다.
-“이보게, 좀비 영화가 유행하니, 이젠 내가 좀비야, 숨만 붙어 있잖아(웃음).”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네. 자네가 글로 내 사회적 죽음을 공표해주게.”
“글로 써주게, 사람들에게 너무 아름다웠다고, 정말 고마웠다고.”-
정말 얼마나 아름다운 임종어 유언인지요! 너무 아름답고 고마웠던 인생이라니! 기사 사진은 한밤중에 찾아와 이어령 선생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참고 온힘을 다해 노래하는 가수 장사익의 모습이 역시 아름다운 감동이었습니다. 이어 계속되는 기사입니다.
-살아온 대로 죽는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그는 그가 말하고 쓴대로 시간을 쓰고 완벽하게 연출해갔다, 항암 치료를 일체 거부했고, 치료약을 먹지 않았다. 그의 곁에서 선생의 손발이 되어 밀도 높은 밤낮을 함께 했던 지인들은 말했다.
“선생님을 존경해요.”
일반인들이 멀리서 바치는 ‘존경의 찬사’와는 사뭇 결이 달랐다. 선생은 병원 중환자실에 갇히지 않고,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에서 햇살을 쬐며 삶쪽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은 것은 책이었다.
“3월이면 나는 없을 거야.”
3월을 며칠 앞두고, 그렇게 가장 자기다운 방식으로 선생은 떠났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야.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눈부시게 환한 대낮이지요. 맞아.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화려한 한 가운데. 고향이지. 그 말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요? 어둠이 아니라 빛이라서 그렇지. 밤이 아니라 대낮이라서 그렇지.”
2월26일 정오 경, 환한 대낮에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선생은 죽음과 따뜻하게 포옹하며 자신의 말을 완성했다. 소박하고 경이로운 한국말로 세계의 혁신을 명명했던 언어의 거인, 디지로그와 생명자본, 갓길과 굴렁쇠의 창조자, 참가자이자 감독의 역할로 생의 한가운데서 죽음의 전과정을 아름다운 선물로 생중계했던 우리의 영원한 문화부 장관 앞에 end 마크 대신 꽃 한송이를 올린다.-
참으로 남은 이들에게 감동적인 최고의 선물인 선종의 죽음을 선물하고 아버지의 본향집으로 귀가한 이어령 선생입니다. 은총의 특별 영적훈련 사순시기입니다. 일년 영적농사의 성패를 좌우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참으로 나이에 관계 없이 모두가 주님의 영적 훈련병이 되어 광야의 영적훈련장에서 영혼과 육신을 자발적 기쁨으로 단련해야 할 절호의 시기입니다.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머리에 재를 얹을 때 주신 주님의 화두같은 말씀이 사순시기 우리의 겸손을 북돋웁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사람(homo)이요 겸손(humilitas)임을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흙같이 겸손해야 참으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베네딕도회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베네딕도 규칙중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전장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무려 1500년 역사를 지닌 사순절에 관한 영적 고전같은 가르침입니다.
“수도자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러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의 섬김의 분량에 어떤 것을 이 시기에 더 늘일 것이니, 곧 특별한 기도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절제이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과 기쁨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각자는 자신이 바치고자 하는 것을 자기 아빠스에게 알려서 그의 기도와 동의를 얻어 실행할 것이니, 영적 아버지의 허락없이 하는 일은 주제 넘은 짓이고 헛된 영광이라고 여겨지며 아무런 공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아빠스의 동의를 얻어 행해져야 한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스럽고 아름다운 사순절 수행을 위한 영적 대가 성 베네딕도의 가르침입니다. 어찌보면 계속 마스크를 쓰고 지내는 코로나 시대에 맞이하는 사순시기는 전적인 회개와 절제, 극기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주목할 것은 부활절을 기다리는 성령의 기쁨, 영적 기쁨으로, 허영이 아닌 겸손한 마음으로 밝고 명랑하게 사순절을 보내라는 것입니다. 기쁨이란 말마디도 73장의 긴 규칙서중 오직 여기서만 단 2회 나온다는 사실이 참 각별한 느낌입니다.
사순시기는 무엇보다 회개의 시기입니다. 요엘서 말씀대로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찟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께 돌아가는 회개의 시기입니다. 전적인 영적혁명과 같은 회개만이 살길입니다. 특히 생태적 회개는 발에 떨어진 불처럼 절박합니다. 어머니 지구가 병들어 죽으면 우리 인류도 같이 죽기 때문입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라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개인은 물론 거족적인, 거국적인, 공동체적인 회개의 실행을 촉구하는 요엘 예언자입니다. 회개를 통한 하느님과 화해, 이웃과의 화해, 자연과의 화해요, 분열과 갈등에서 화합과 일치입니다. 한 두 번의 회개가 아니라 매일 평생 회개해야 하는 회개의 여정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감동적 권고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바로 지금이 매우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입니다.”
바로 오늘 여기가 회개의 자리요, 오늘 지금이 매우 은혜로운 구원의 때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실천은 구체적이라야 합니다. 참으로 전통적인 회개의 실천적 수행인 기도, 자선, 단식에 충실해야 할 사순시기입니다. 이 모두는 자기 과시의 허영과 교만의 수행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감춰진 수행일 때 빛납니다.
기도를 통한 하느님과 개방과 일치요, 자선을 통한 이웃과 개방과 일치이며, 단식을 통한 참나와의 개방과 일치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에 기도요, 이웃과의 관계 회복에 자선이요, 나와의 관계 회복에 단식입니다. 8개 악덕중 첫 자리에 있는 탐식입니다. 탐식-음욕-물욕-분노-슬픔-나태-허영-교만의 순서입니다. 모든 악덕의 뿌리에 탐식이 있습니다. 탐식을 단식으로 바꿔 말씀을 배고파 하는 욕구로 바꾸는 것입니다. 단식을 통해 성욕과 물욕의 자제요, 절약된 것은 자선으로 나눌 때 인색의 병도 치유됩니다.
“먹고 겸손한 것이, 안먹고 교만한 것보다 낫다.”
참 평범한 말마디가 겸손이 결여된 헛된 수행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켜 줍니다. 참으로 단식과 자선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가 간절하고 한결같은 기도입니다. 그러니 순서로 하면 기도-단식-자선입니다. 결코 우울하고 무겁고 어둔 기도-단식-자선의 수행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의 자발적 기쁨에 넘치는 밝은 회개의 실천적 수행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그대로 아버지 마음에 정통한 아버지와 일치된 예수님 심중을 반영합니다. 정말 하느님께 절대적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두지 않으면 불가능한 명령입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은 물론 종파를 초월하여 영성 대가들이 극찬했던 산상수훈에 나오는 오늘의 가르침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실천적 겸손한 세가지 수행의 주님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이런 이웃들에게 감쪽 같이 숨겨진 하느님 중심의 겸손한 수행자들이 참 관상가요 영성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 은혜로운 영적훈련의 사순시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회개, 기도, 단식, 자선에 집중적 실천의 수행이 절실한 시기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