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삶-2022.3.16.사순 제2주간 수요일

by 프란치스코 posted Mar 16,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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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16.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예레18,18-20 마태20,17-28

 

 

 

섬김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삶-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섬김의 삶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오늘은 “섬김의 여정-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강론 제목을 택했습니다. 여정이란 말마디 요즘 부쩍 많이 강론 주제로 삼게 됩니다. 우리 평생 삶을 일일일생 하루에, 일년사계 사철에 대입해 보면 내 삶의 여정중 현위치가 드러날 것입니다. 

 

과연 평생 삶을 하루로 압축했을 때, 오전 오후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과연 평생 삶을 일년사계로 압축했을 때 사철중 어느 시점에 위치해 있겠는지요? 제 경우 수차례 언급했습니다만 일몰을 6시로 계산한다면 하루중 오후 4시 정도, 사철중 초겨울이 좀 지나지 않았겠나 생각됩니다. 

 

오래 살고 짧게 살고가 아니라 깨어 온전한 정신으로 사는 것이 문제이겠습니다. 어쨌든 이런 성찰이 오늘 지금 여기서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게 합니다. 6년전 써놨던 “하루에 평생을 사네” 란 시를 얼마전 원장 수사가 강론시 인용했기에 전달 받아 인용합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기를 소망하며 썼던 시입니다.

 

“날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잠깨는 새벽

 

일출日出

찬란할 때는

가슴뛰는 소년少年

 

한낮

햇빛 밝을 때는

활력넘치는 찬미讚美의 청년靑年

 

일몰日沒

고요할 때는

원숙圓熟한 노년老年

 

감사感謝로

하루를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밤

 

하루에

평생平生을 사네

더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나”-2016.2.8. 설날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해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삶은 예외없이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끝납니다. 하느님이야말로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요 방향이자 삶의 중심이자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하느님으로부터 시작하여 하느님으로 끝나는 여정입니다. 오늘 다룰 여정은 섬김의 여정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당신 수도자들의 공동체를 일컬어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라 정의했습니다. 평생 섬김을 배워가는 여정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과 이웃을 잘 섬겨가는 섬김의 여정중의 삶인지 성찰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의 예수님 처지가 흡사합니다. 고립무원의 참 외롭고 고독한 처지의 두 분입니다. 이런 와중에도 하느님 중심의 확고한 삶이었기에, 참으로 애오라지 하느님과 더불어 이웃을 충실히 섬겨온 삶이었기에 두 분은 위기의 순간을 잘 통과합니다. 다음 예레미야의 하느님께 하소연하는 기도가 그의 하느님과 이웃에 충실했던 섬김의 삶을 요약합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그런데 그들은 제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섬김의 여정에 주님과의 친밀한 대화의 기도가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배은망덕한 사람들에 좌절할 때 마다 주님과 깊은 신뢰의 기도를 통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다시 주님과 대화의 기도를 통해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었던 예레미야 예언자였습니다. 

 

사실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바치는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가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는 여정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을 주는지 깨닫습니다. 기도와 섬김의 삶은 함께 갑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지칠줄 모르는 섬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처지 역시 참 외롭고 고독해 보입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주님 중심의 공동체라기 보다는 동상이몽의 철부지 제각기 공동체 같습니다. 제3차 주님의 수난 예고가 끝나자 마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두 아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스승님의 나라에서 두 아들을 스승님 좌우에 앉게 해 주십사 청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 본 열 제자는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 하니 내심 그들의 속셈이 드러났습니다. 동상이몽의 불순한 공동체임이 폭로되는 장면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수난에 공감하며 동참하려는 마음이 전무하니 예수님 마음은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을까요. 

 

그러나 하느님과 이웃을 항구히 사랑과 겸손으로 섬겨왔던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철부지 제자들의 현실에 실망하거나 좌절함이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제자들의 삶에서 무엇이 본질적이지 가르칩니다. 군림하고 통치하며 세도를 부리는 세상 통치자들의 태도와는 판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 제자들의 공동체를 섬김의 공동체로 정의합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새삼 어제 강조했던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영성’이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심 섬김과 종의 영성입니다. 그 결정적 장면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장면일 것입니다. 

 

애당초 타고난 섬김의 사람은 없습니다. 부단히 주님의 섬기는 삶을 깨달아 배워가면서 섬김의 삶도 날로 깊어갈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도 이런 일련의 가르침을 통해 섬김의 삶이 자기들에게 얼마나 본질적인지 크게 깨우쳤을 것입니다. 참 영성의 잣대는 섬김의 삶에 있습니다. 

 

과연 주님을, 이웃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는 삶에 항구한지요. 섬김의 여정을 통해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섬김의 여정은 그대로 예닮의 여정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닮아 섬김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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