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3.20.사순 제3주일 탈출3,1-8ㄱㄷ.13-15 1코린10,1-6.10-12 루카13,1-9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만나라! 회개하라! 시작하라!”-
온통 우울하고 어둔 소식들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절에는 시詩가 참 좋은 힘이, 위로와 구원이 됩니다. 진리는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영원한 현재성을 지닙니다. 아주 예전 자작시가 오랜 후 이렇게 강론에 인용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습니다. “하늘길’과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라는 두편의 시를 소개함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참 많이도 굽었다
하늘빛 찾아가는 길
순탄대로 곧은 길만은 아니다
첩첩의 장애물 나무들옆
좁은 틈바구니
하늘빛 찾아 이리저리 빠져나가다 보니
참 많이도 굽었다
조금도 부끄러울 것 없다
거룩한 아름다움이다
살아있음이 찬미와 감사다
하늘빛 가득 담은
내 사랑
침묵의 소나무야!”-2001.4.21
그때 소나무는 지금도 여전히 수도원 성전 앞 정원에 건재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환경중에도 제자리에 믿음의 뿌리 깊이 내리고 하늘빛 희망을 찾아 하늘 사랑 가슴에 가득 품고 꾿꾿이 살아가는 신망애信望愛 영적 도반道伴들이 곳곳에 있음은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봄
16년전 써놓은 시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한 내 사랑, 내 도반 불암산입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다짐하며 정주의 삶을 늘 새롭게 했던 불암산입니다.
절망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흔히 나오는 질문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30년전 1992년 1월15일,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왜관 수도원 종신서원식 미사때 제 강론 제목이자 제 두 번째 졸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현실성을 지니는 물음이자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첫째, “만나라!”입니다.
삶은 만남의 연속이자 만남의 여정입니다. 만남의 기쁨, 만남의 행복입니다. 만남에 따라 내 운명이 결정됩니다. 참 좋은 만남이 참 좋은 삶을 만듭니다. 이런 만남 역시 은총이자 선택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참 나를 찾아 참 나를 살기 위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참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다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주님을 만났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다 시피 광야의 외로움과 고독중에 장인 이트로의 양떼를 치던 모세가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끝내 참나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모세를 찾아 오기전 모세는 분명 주님을 간절히 찾았을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간절하고 항구한 갈망이 있을 때 주님은 찾아와 만나 주십니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 가까이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모세야, 모세야!”
“예, 여기 있습니다.”
“이리 가까이 오지 마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눈만 열리면 내 삶의 자리 지금 여기가 주님을 만나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자리입니다. 이어 모세는 주님께 소명을 받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당신 이름을 계시하십니다. 이제 모세는 예전 모세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를 찾았으니 결정적 운명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삶은 주님과 만남의 여정입니다. 한 두 번의 만남이 아니라 모세와 주님의 관계처럼 살아 있는 그날까지 우리의 주님과의 우정도 날로 깊어져 가야 합니다. 이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필수입니다. 아무리 육신은 노쇠해 가도 주님을 찾는 영적 갈망은 날로 커져야 하고 주님과의 영적 우정은 날로 깊어져야 합니다.
둘째. “회개하라!”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즉시 이어지는 회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요 겸손이요, 참나의 발견입니다. 마음의 고질적 병인 무지의 치유에 답은 회개뿐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회개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참나를 발견하여 참나를 살게 하는 회개입니다.
주변에서 보게 되는 많은 불행을 겪는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회개하지 않으면 언제든 겪을 수 있는 불행입니다. 바로 이런 무수한 불행한 사건들은 지체없이 회개하라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주님은 빌라도의 악행과 실로암 탑의 사고를 예로 들면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회개하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큰 불행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탈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지 않아 자초했던 불행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대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광야에서 죽어 널브러졌습니다. 그들은 악을 탐냈던 것처럼, 우리는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투덜거리는 것처럼 여러분은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대로 오늘 광야 인생 여정중에 있는 우리에게 참 적절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되는 말씀입니다. 무지의 악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불행이 무지의 탐욕에서 기인함을 봅니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원망이나 불평을 하느님 찬미와 감사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살길은 회개 뿐이요 무지의 병과 악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입니다.
셋째. “시작하라!”입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살아 있을 때 회개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찬미와 감사지 죽으면 찬미도 감사도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최선을 다하며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의 가르침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내자는 포도원 주인에 대한 포도 재배인의 간청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은 회개의 열매를 맺지 못한 이들을,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포도 재배인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주님의 은총에만 맡겨서는 참으로 무책임한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에 응답하여 우리 친히 늘 새롭게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늘 내 삶의 나무를 정성껏 가꾸고 돌보는 것입니다. 참으로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랑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회개의 열매, 사랑의 열매입니다.
잘 살다 잘 죽는 것보다 큰 축복은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날마다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늘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회개하고 사랑하며 잘 살라 주어지는 선물의 날들입니다. 1787년 4월 11일 모차르트는 이런 글을 남겼다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음악이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이는 나를 끝없이 행복하게 만든다
숭고한 지성도 환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이 둘이 합쳐져서 천재를 만들지도 않는다.
사랑! 사랑! 사랑!
이것이 천재의 영혼이다.”
끊임없는 회개의 은총이 겸손과 사랑의 참나를 만들어 줍니다. 회개의 여정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하시며 참나를 살게 하십니다. 아멘.